그해 12월 마지막 날, 나는 서울 북서쪽 변방의 한 시니어 하우스로 이사를 했다. 이곳은 말 그대로 노인을 위한 아파트다. 그러나 나이가 많을수록 환영하는 건 아니다. 85세 이상은 입주 불가라는 연령 제한이 있었으니 말이다. 석 달만 더 늦었어도 나는 그 제한 조건에 걸려 이곳 문턱을 못 넘을 뻔했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고 보니 모든 게 정나미가 떨어졌다. 물론 쉽지만은 않은 결심이었다. 그런데 그 결심보다도 더 어려운 관문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자격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시니어하우스 입소가 어려운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아이들 곁을 떠날 각오가 서고, 내게 그만한 경제력만 있다면 서울 시내 어느 곳이든 ‘어서 옵쇼’ 하며 문을 활짝 열어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돌아다녀 보니, 나를 반겨줄 곳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유는 내 나이 85세가 입소 자격 요건에 부적격이라는 것. 전혀 뜻밖의 걸림돌에 나는 휘청거렸다. 내 나이가 너무 많다고? 운전면허증 갱신한 게 엊그젠데, 나를 늙은이라고 내쳐? 명치끝에서 부아가 끓어오른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기엔 오랜 시간 궁리하고 결심에 이르기까지의 마음고생이 아까웠다. 낙심천만해하는 시어미를 보고 며느리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나 보다. 좀 후미진 동네긴 한데, 한번 가보자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못 이긴 척 따라와 보니 바로 이곳. 만 85세까지 입주 가능하단다. 맙소사! 간신히 턱걸이로 들어올 수 있는 집을 발견한 것이다.
내가 이사 온 곳은 A동 212호다. 거실 귀퉁이에 손바닥만 한 주방이 있고 침실 옆에는 작은 방이 하나 딸려 있다. 혼자 살기에 안성맞춤이어서, 단박에 마음이 갔다. 자칫하면 놓칠 뻔했다는 생각에 너무 허둥댔던 걸까? 나는 그만 이 집의 치명적인 흠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 집은 컴컴하다. 대낮에도 컴컴하다.
시간에 쫓기지만 않았다면 여유를 두고 천천히, 하다못해 평수라도 좀 크고, 남향에 가급적 층수가 높은, 조금 나은 집을 고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놈의 나이 때문에 기다리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었다. 당장 입주 가능한 집은 이곳뿐이었다. 직원 안내로 처음 집을 구경할 때는 조명을 있는 대로 밝혀 놔서 어두운 줄을 몰랐다. 하긴, 어둡다는 걸 알았다 해도 내 선택에 영향을 주진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입주’ 말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 하는 수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을 흰색 일색으로 도배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어둠침침한 집에 어떻게든 정을 들여야 한다. 거실 동남쪽에 유일한 창문, 그 너머에는 밉상스러운 7층 회색 건물이 완전히 시야를 가로막고 떡하니 서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좁은 틈새에 소나무 한 그루가 버티고 있어, 커튼을 젖히면 초록색 소나무 잎이 와락 달려든다. 노고를 마다 않고 창문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면 소나무 옆에 내가 좋아하는 목련 나무도 있다. 할렐루야!
내 일과가 궁금한가? 그 얘길 하자면 우선 내 짝궁 소개부터 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녀는 자그마한 키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를 갖춘 80세 여인이다.
그와 나는 식당에서 만난다. 하루 세 끼, 아니면 두 끼, 때마다 2인 식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위와 장에 약간의 문제가 있는 그녀는 밥을 천천히 꼭꼭 씹어 먹는다. 반면 일찌감치 식욕과 남남이 된 나는 무조건 오른쪽 반찬 그릇부터 비워 나간다.
동네나 한 바퀴 돌아볼까? 난 아직 내가 사는 건물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구조조차 파악 못 하고 있다.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난 건물을 벗어나는 즉시 길을 잃고 허둥댄다. 땅바닥을 살펴봐야 하니 주위를 돌아볼 경황이 없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려는 게 아니고 돌부리에 걸려 엎어질까 봐 온통 신경은 들쑥날쑥한 길바닥에 가 있다. 길은 좁고 인도와 차도의 턱은 부실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가 간판은 잘 읽히지 않고 얼룩덜룩하기만 하다. 동네 한 바퀴 산책이 아니라 자책만 하다 되돌아갈 판이다. 도대체 내가 사는 이 아파트는 무슨 색이지? 내 머릿속은 텅 빈 채 낯선 거리의 느낌만 남아 있다. 내가 예전에도 이렇게 멍청했던가? 도대체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됐지?
훈훈한 로비에 들어서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 나를 보며 알은체한다. 나는 각종 신문이 비치돼 있는 소파 쪽으로 몸을 돌린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 내가 보는 조선일보를 골라 잡으려면 이 시간대는 어렵다. 오전 7시 아침 식사 이전에 오면 사람 손을 타지 않은 상큼한 신문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운동이 먼저다. 보통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신문을 곁눈질하며 로비를 지나쳐 헬스장으로 간다. 러닝 20분 하고 근력 운동 20분, 그리고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하고는 식사 시간에 맞춰 옷을 갈아입으려고 서둘러 내 방으로 달려간다. 아침 먹고, 잠시 숨 돌렸다가 ‘의자체조’ 하고, 오전은 이렇게 속절없이 지나간다.
오후 시간은 내가 할 만한 게 마땅치 않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같은 2층 입주자의 권유로 합창단에 들어갔는데 왕년의 내 실력을 믿고 우쭐대며 노래 부르다 성대가 쪼그라들어 음치가 된 것을 비로소 알았다.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노래, ‘목장 길 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 님 함께 집에 오는데’를 부르다 갑자기 눈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낯선 곳에 있으면 세상을 떠난 남편의 부재를 받아들이게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살던 동네를 떠나 낯선 동네로 왔다고 해서 슬픔마저 버려지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