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박상훈

옛날에는 사람 모여드는 곳 가까이 무덤을 마련했다. 그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남은 삶의 소중함을 환기하는 방식이었다. 셰익스피어 극 ‘햄릿’의 묘지기는 노래하며 무덤 파는 익살꾼이다. “이 친구는 자기가 뭐 하는지 느낌이 없나, 무덤을 파면서 노래 부르게?”라고 햄릿이 묻자 “습관이 그 일을 편하게 만들었나 보죠”라고 호레이쇼가 답한다. 습관도 습관이지만, 그 유쾌함은 죽음에 반사된 생명력의 발현일 테다. 무의식이 그에게 속삭이는 것이다. 이제 곧 침묵할 테니 지금 실컷 말하고, 이제 곧 몸 눕혀 잠들 테니 지금 열심히 움직여야지. 살아서는 썩지 말아야지.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의 자료(‘죽음 앞의 인간’)에 따르면, 중세에 공동묘지는 교회로 편입되었다. 교회가 죽음의 악령을 잠재우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는 개개인 묘를 장식하는 각종 예술품과 비석이 넘쳐났다. 18세기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좀 더 선명히 분리해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애도 의식을 정착시켰다. 공동묘지는 교회를 벗어나 변두리에 조성했고, 그곳을 거닐며 삶의 의미를 사색하는 일이 유행했다. 묘지 시도 인기를 끌었다.

“빛나는 가문, 화려한 권세,/ 그 모든 아름다움과 그 모든 재산을/ 피할 수 없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 영광의 길마저도 무덤으로 이어질 뿐./ (...) / 봐주는 이 없이 붉게 피어오른 수많은 꽃/ 황량한 대기에 향기를 흩뿌린다.”(토머스 그레이 ‘시골 묘지에서 쓴 애가’)

육체 이상의 것(영혼)을 생각하는 일이 철학이라고 한다면, 적막한 시골 묘지의 고독한 산책자는 철학자나 다름없었다. 묘지를 둘러싼 유장한 자연과 덧없는 삶의 대비, 그리고 ‘저 너머’ 세계를 향한 명상적 동경에 뒤이은 것이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낭만적 개념이다.

그런데 죽음을 은유로써 미화하는 것은 그것을 멀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체 자체는 외면당한다. 아리에스는 ‘금지된 죽음’이라고 표현했다. 현대인에게 죽음은 무섭고, 아름답지 않고, 수치스럽다. 그래서 심각하게 아프다는 사실을 감추고, 병자를 격리하고, 망자에 대한 격한 감정을 절제한다. 죽음은 편재하지만, 막상 그것은 저~기 어딘가, 눈 안 띄는 곳에 숨겨져 있다. 옛날 사람에게는 가장 나쁜 방식의 죽음이었던 급사(急死)가 현대인에게는 오히려 행운인 양 여겨진다. 옛날에 죽음은 스스로, 또 함께 준비하며 기다리는 과정이었는데, 지금은 될 수 있는 한 의식 없이 죽고 싶어 하고, 산 사람은 어떻게든 후다닥 죽음의 자취를 지워버리려 한다. 일상 복귀는 빠를수록 좋다. 죽음은, 존중받는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못하다.

먼 훗날 역사가는 21세기형 죽음을 어떻게 기술할까? 묘지 없는 시대다. 대부분 홀로 죽을 것이며, 대부분 땅에 묻히지 않을 것이다.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고 톨스토이가 질문했을 때 정답은 무덤 길이인 3아르신(약 2미터)이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대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얼마 전 모임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다. 나이 많을수록, 혼자 사는 사람일수록 사후 처리는 당면 과제 1순위에 속한다. ‘나 죽은 뒤 대홍수가 나건 말건’(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말) 상관할 바 아니라는 방임주의자도 물론 있다. 삶이 비교적 편안하고 자식과 사이 좋은 사람은 별걱정 안 한다. 결정권을 거머쥔 자식이 알아서 해주겠거니 믿기 때문이다. 납골당 선호도는 높지 않다. 아무 의미 없다고 이구동성이다. 그런데도 ‘6성급 호텔형 프리미엄 봉안당’처럼 극도로 상업화한 ‘명품’ 납골당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장묘 시설마저 대한민국 1%와 나머지 99%로 양극화하고 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한데 말이다.

다들 소박하게, 그러나 존엄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을 모았다.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가만 분분했을 뿐이다. 자리 좋은 곳에 이름표 단 나무 벤치를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 쉬어가게 하면 어떨까? 분골 섞은 본차이나 도자기를 만들어 간직하면 어떨까? 꽃 가게 앞으로 유산을 위탁해 생전 일터, 또는 자주 가던 곳에 꽃바구니를 정기 배달시켜 놓아두면 어떨까?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면서도, 뭔가 뜻있고 아름다운 것을 남기고자 원했다. 말이 그렇지, 바람처럼 사라지고 싶지 않은 본능이 그렇게도 뿌리 깊었다.

소설 ‘백치’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어찌하면 더 잘 죽을 수 있을까요?” 말기 폐병 환자가 이렇게 물으니, 주인공이 ‘백치’다운 명언을 한다. “그냥 지나가세요.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의 행복을 용서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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