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지구
조금 떨어진 곳에
봄의 달
水(みず)の地球(ちきゅう)すこしはなれて春(はる)の月(つき)
사회 초년생 시절, ‘일본 온천’이라는 책을 샀다. 열도 구석구석 온천지가 수록된 책이었다. 월급도 모았고, 해외여행을 못 가본 엄마와 이웃 나라에 다녀오자. 엄마에게 책을 건네며 내가 말했다.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봐. 그동안 나 키우느라 고생했으니까, 온천 가자.”
엄마는 아마도 그 책을 세 번인가 네 번쯤 읽었을 것이다. 집에 와보면 노트 필기까지 하고 있다. 이 온천은 이게 좋고, 저 온천은 저게 좋고. 어디가 좋을까? 아니, 이러다가 온천 박사 되겠네. “이번 여행은 무조건 엄마가 결정해!”
공부 끝에 엄마는 규슈 구마모토현 구로카와 온천을 골랐다. 버스에서 내리니, 깊은 산속에 물소리 새소리 들린다. 옛날 옛적 같은 고즈넉한 물의 마을에서, 우리는 낯설고 신비로운 세계에 몸을 담그며 시름을 잊었다. 아, 좋구나. 물에는 영혼의 빈터를 채우는 힘이 있다.
마사키 유코(正木ゆう子·1952~)의 하이쿠를 읽는데 오래전 그 온천 마을이 떠오른다. 시인도 구마모토에서 이 시를 지었기 때문일까. 시인의 고향인 물의 도시 구마모토 시내에는 둘레가 6km에 달하는 호수 에즈호가 있다. 노을 진 봄날, 물의 신을 모신 작은 사당 돌계단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던 시인은, “아, 지금 달과 지구가 나란히 태양 빛을 받고 있구나”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달과 석양에 물든 건, 지구가 아니라 나의 얼굴이지만, 나는 곧 지구의 일부다. 긴보산 너머로 기우는 태양이 내 얼굴을 따뜻이 비춘다. 문득 뒤돌아보니 동쪽에 달이 떴다. 달도 나도 똑같이 태양으로 얼굴을 향했다. 만약 먼 우주에서 본다면, 지구와 달이 사이좋게 태양 빛을 받고 있겠지.’ 하이쿠 쓰는 여성의 일상을 다룬 산문집 ‘열일곱 음의 이력서’에서 가져왔다.
봄비로 촉촉한 4월의 끝자락, 24절기로 곡우(穀雨)를 지나고 있다. 어느덧 봄철 마지막 절기, 곡물[穀]이 익어가는 데 꼭 필요한 봄비[雨]가 내리는 시기다. 옥토를 만드는 생명의 봄물이, 지구에 사는 우리 모두를 보드랍게 어루만지며 윤기를 더한다.
그리하여 태양 아래 반짝반짝 땅과 식물과 새와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싱그러운 봄빛을 이루는 계절. 온천도 좋고, 호수도 좋고, 작은 물웅덩이도 좋고, 그 속에 비친 달 그림자를 보며 촉촉해진 얼굴을 드는 봄밤이다.
“그러네, 우리는, 지구는, 달과 사이좋게 나란하네.” 그러자 오래전 씨를 뿌린 무언가가 당장이라도 열매 맺을 것처럼, 내 마음은 비옥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