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를 쏴 죽인 안중근 의사 재판에서 쟁점이 된 것은 ‘관할’과 ‘입법 미비’였다. 1910년 2월 12일 중국 뤼순 지방법원에서 열린 마지막 변론에서 국선 변호인 가마다 세이치는 안 의사의 무죄를 주장했다. 가마다는 “하얼빈은 청나라 영토인데, 청나라는 한청통상조약에 의해 자국에서 벌어진 한국인 범죄에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있다. 안중근을 처벌하려면 한국 법에 따라야 하는데, 지금 한국 형법은 자국민이 국외에서 저지른 범죄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안 의사는 최후 진술에서 자기 변호인의 주장을 뒤집는다. 안 의사는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 아무런 명문이 없어 무죄라고 한 것은 매우 부당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은 모두 법률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다. 살인을 해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결코 개인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한 것이며, 따라서 나는 전쟁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이곳에 온 것이므로 국제 공법에 의해 처벌해 줄 것을 희망한다”고 했다. 교전 중의 정당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 재판 기록을 들여다본 것은 어떤 검사장이 헌법재판소를 가리켜 “일제 재판관보다 못하다”고 했기 때문인데, 판사의 태도보다 눈길을 끈 것이 안 의사 최후 진술이었다. 31세 청년 안중근은 일제 재판관 앞에서 품위를 잃지 않고 당당했다. 사형이 선고되자 “어질고 약한 한국 국민으로 태어난 죄”라며 항소도 포기했다.
115년 후 안 의사가 목숨 바쳐 지키려던 나라의 지도자들이 하루 간격으로 법정에서 최후 진술을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탄핵 심판 최후 진술에서 12·3 계엄은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라고 했다. 대통령 말대로 야당은 입법 폭주와 줄탄핵, 예산 삭감으로 국정에 발목을 잡았다. 모르는 국민이 없다. 다만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발언권이 가장 센 사람이다. 계엄이 아니라도 대국민 호소 수단은 많다. 국민을 설득하려는 본인의 노력이 부족했다면 몰라도 호소할 기회와 수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최후 진술에 국론 분열을 수습하는 발언이 없었던 점도 아쉽다. 계엄 이후 윤 대통령 지지와 반대 측 갈등이 심각한데, 자기 지지자를 고무하는 발언만 한 것은 대통령답지 못했다. 헌재 결정에 승복하겠다는 말도 없었다.
이튿날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2심 최후 진술은 용렬했다. ‘김문기 모른다’ 부분에 대해 이 대표는 “어느 날 아내와 과거 얘기로 싸웠는데 서로 얘기가 달랐다. 저는 아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했고, 아내는 제가 거짓말한다고 했다. 기억이라는 것은 소실돼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장황한 변명조로 늘어놨다. 이 대표는 ‘국토부 협박’ 발언에 대해서도 “제가 ‘협박’이란 표현은 화가 나서 과하게 했다. 표현상 제 부족함을 감안해 달라”고 했다. 역시 고의가 없는 즉흥적 발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발언이 나온 건 국정감사에서다. 화가 나서 즉흥적으로 한 게 아니고 그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하고 설명 자료까지 준비했다.
최후 진술을 하는 사람은 대개 궁지에 몰려 있다. 여기서 품격이 드러난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당시의 안 의사보다 더 오래 살았고, 변호사 자격증도 갖고 있다. 하지만 안 의사 최후 진술에서 느낀 당당함과 품격을 두 사람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안 의사도 자신이 목숨을 던져 지키려던 나라의 미래 지도자들이 이런 모습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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