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국회 외통위·산자위·정보위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미국 에너지부의 한국 ‘민감 국가’ 지정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조셉 윤 주한 미국 대사 대리가 “‘민감 국가 목록’은 에너지부에 국한된 문제”라며 “큰일이 아닌데 마치 큰일인 것처럼 통제 불능 상황이 돼서 유감”이라고 말한 후였다. 실제 이 목록은 미 에너지부 산하 연구소 17곳의 보안과 용역 업체 통제를 위해 작성된다. ‘민감 국가’란 명칭 때문에 실체보다 일이 커진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은 이 사안이 “윤석열 정부 외교 참사의 결정판“이란 주장을 꺾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민주당 의원들이 낭독한 기자회견문 내용이었다. 미국 측이 제기한 “민감 정보 취급 부주의” 문제에 대해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우리 정부 당국이 어디까지 연루”됐는지를 조사해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미 에너지부 감찰관실 보고서에 나오는 사례를 언급했다. 미 에너지부 산하 한 연구소의 용역 직원이 수출 통제 대상인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를 갖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려다가 적발됐고, ‘외국 정부’와의 소통도 확인됐다는 내용 말이다. 민주당 의원들은 “외국 정부는 ‘한국’으로 대부분 추정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큰 문제”라며 “기술 유출 의혹은 중대한 범죄”라고 했다. 또 “동맹국을 상대로 기술 유출 공작을 시도한 것 자체가 위중한 동맹 훼손 행위”라며 국회 상임위를 열어 사건의 전말을 조사한 뒤 국민에게 밝혀야 한다고 했다.
정보 활동이란 무엇을 했다는 것도 비밀이지만, 무엇을 하지 않았다는 것도 비밀이다. 미국이 직접 한국 정부나 국정원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 것도 아니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미국 측이 “특정한 사례를 가지고 (보안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만약 상대국이 먼저 무슨 혐의를 상세히 공개했다면, 왜 일을 이렇게 처리하냐고 정부를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도 아닌데 우리 국회가 먼저 한국 정부에 ‘범죄’ 혐의가 있으니 조사해 보자고 나서야 할 이유가 뭔가.
민주당은 아마도 문제의 보고서가 윤석열 정부 출범 후인 2023년 10월부터 2024년 3월까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럴 것이다. 정부·여당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런데 시기를 막론하고, 국정원이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기술이나 정보를 미국에서 빼내려고 했다고 상상해 보자. 설령 그랬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 국회가 먼저 국정원을 불러 그런 시도를 했냐고 추궁하고 상대국보다 먼저 까발릴 일인가?
미·중 어디를 막론하고 지금 세계의 모든 나라는 치열한 정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적성국이든 동맹국이든 내 나라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갖고 있다면 빼내려고 시도하고, 반대로 내 나라의 정보와 기술을 빼내려는 시도는 막으려고 애쓰고 있다. 모든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수도 있다. 미국이 동맹국을 감시·감청하다가 들통났다고 해서, 미 의회가 이를 금지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을 민감 국가로 지정하게 된 배경에는 치열해진 신흥 과학기술 경쟁 속에 기술 보안을 강화하려는 흐름이 있다고 한다. 이번 사태로 우리 국회가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흐름을 배우는 것이다. 제 눈 찌르기 식으로 우리 정보 활동을 파헤치기 전에, 우리 정보·기술을 빼 가려는 외국의 활동을 막는 조치부터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다. 간첩죄 적용 범위를 ‘적국’에서 ‘외국’으로 확대하는 간첩법 개정이 그 첫걸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