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초선 의원 58명이 국가정보원의 대공(對共) 수사권을 없애는 내용의 국정원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전원 참전하는 ‘벌 떼 공격’에 나섰다. 흥행 실패를 예상하고 ‘충분한 필리버스터’를 약속했던 더불어민주당은 사흘 만인 13일 이를 강제로 종결하고 국정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명분은 ‘코로나 방역’이었지만 정치권에선 “야당 의원들이 문재인 정부의 실정(失政)을 공격하자 견디지 못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국민의힘 초선인 윤희숙 의원은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을 세웠다. 종전 기록은 이종걸 전 민주당 의원의 12시간 31분이었다. 박병석 국회의장이 코로나 방역 차원에서 정회하기까지 윤 의원은 선 채로 12시간 47분간 발언을 이어 갔다. 프랑스 정치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를 직접 읽어가면서 정부·여당의 독주를 지적했다. 민주당 의석에서 “가르치려 드느냐”는 야유가 나올 땐 “이번 기회에 공부 좀 하시라”고 맞받았다. 국민의힘 동료 의원들은 ‘철(鐵)의 여인’이라며 응원했다.

국민의힘 윤희숙(가운데) 의원이 1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정원법 개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마친 뒤 동료 의원들로부터 격려를 받고 있다. 윤 의원은 전날인 11일부터 12시간 47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진행해 종전 최장 기록(12시간 31분)을 경신했다. /연합뉴스

10일 시작된 이번 필리버스터의 첫 주자는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이었다. 재선인 이 의원은 “누군가 국민을 향해 호소했다는 기록만큼은 남겨둬야 한다”며 8시간 44분간 버텼다. 이어 조태용(4시간 48분), 김웅(5시간 7분), 윤희숙(12시간 47분), 안병길(5시간 16분), 김태흠(2시간 39분), 윤두현(4시간 33분) 의원이 평균 6시간 가까이 단상에 섰다. 안병길 의원은 “대통령께서 새로운 사저(私邸) 대신 그곳에 국민을 위한 임대주택을 설치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김태흠 의원도 “1966년 국회에 오물을 투척한 김두한 의원의 심정이 이해되고 저 또한 그런 충동을 느낄 정도”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처음엔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여기에는 ‘무기력 야당’에 대한 조롱도 섞여 있다는 게 정치권 분석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필리버스터를 보장하니까 국민의힘이 당황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초선 의원 중심으로 집단 필리버스터에 나서며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 수위를 끌어올리자, 민주당은 이틀 만인 12일 돌연 무제한 토론 종결 동의서를 냈다. 그러면서 국민의힘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를 깎아내렸다. 박진영 부대변인은 윤희숙 의원을 겨냥해 “코로나 위기 상황에 남의 책 읽으면서 기록 깨서 행복하냐”고 했다. “격(格)도 내용도 논리도 없다”(윤건영 의원) “무제한 막말”(강선우 의원)이라고도 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도 “무제한 국력 낭비”라고 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야당이었던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서적, 언론 기사, 판결문에다 인터넷 댓글까지 낭독했다. 당시 다수당이었던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은 필리버스터 강제 종결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당은 13일 오후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를 77시간(정회 16시간 포함) 만에 중단시키고, 국정원법 개정안을 본회의 표결에 부쳐 통과시켰다. 민주당에선 조응천 의원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개정 때에 이어 이번에도 표결에 불참했다. 민주당은 이어서 곧바로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일명 ‘대북전단 금지법’) 처리를 시도했고, 국민의힘은 이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민주당은 이에 대해서도 종결 동의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