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김병문 기자 = 6·25전쟁 국군포로 김모씨가 24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앞에서 물망초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주최로 열린 국군포로 미송환 조사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05.24. dadazon@newsis.com

수많은 국군포로와 그 가족들이 평안남도 개천군의 조양탄광에서 강제 노동에 내몰리는 것을 목격했다는 탈북자의 증언이 4일 공개됐다. 1960년대 고위급 인사였던 친척의 숙청으로 일가족이 조양탄광으로 추방됐다는 탈북자 Y(60)씨는 최근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를 만나 당시 알고 지냈던 국군포로 9명의 실명을 거론했다. 최 대표는 Y씨의 증언을 국방부에 전달하고 생사 확인을 비롯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국방부는 “국군포로의 신원 정보는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따라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북한에서 노동당 강원도당 책임비서(도지사)를 지낸 김종항의 친척인 Y씨는 김종항이 1960년대 종파분자로 몰려 숙청되면서 조양탄광으로 추방됐다. Y씨는 최 대표에게 “조양탄광은 1955년 이후 국군포로, 월남자 가족, 전쟁 당시 부역자, 납북자 등 성분이 가장 나쁜 사람들을 동원해 개척한 탄광으로 오지 중에서도 오지”라며 “내 앞집, 옆집, 뒷집 모두가 국군포로 가정이었다. 그 자녀들과 학교를 같이 다녀 잘 알고 지냈다”고 했다.

Y씨에 따르면 파월 국군 출신의 정준택 하사는 1970년 북한에 왔으며, 탄광에서 굴진공(갱도를 굴착하는 광부)으로 일했다. Y씨는 “처음엔 (정씨가) 북에 와서 기자회견을 했다고 해서 월북자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월남에서 부대 밖으로 나왔다가 북한에 납치된 경우였다”고 말했다. 이어 “정씨를 마지막으로 본 1980년에 그의 쌍둥이 딸이 6세였다”며 “정씨는 (탈북 이후) 전화로 접촉한 2005년에도 거기에 살고 있었다”고 했다. 정 하사의 이름은 국방부가 파악 중인 월남전 실종자 명단에 실제 포함돼 있다. 그의 납북 사실이 알려진 건 처음이다.

6·25 국군포로 이귀생씨는 탄광 채탄공으로 일했으며 아내도 국군포로였다고 한다. Y씨는 “이씨의 1959년생 아들 이병찬도 갱도에서 일했다”고 했다. 역시 국군포로인 구방구씨는 “대구 출신의 국군 장교라고 들었다”며 “아내 없이 1960년생 아들 구병삼과 함께 살다가 1980년대 중반에 사망했다”고 했다. 이 밖에도 Y씨는 같은 동네에 살았던 국군포로로 이형제, 민채기, 민병언, 박삼룡, 김창현, 성경복 등 6명의 이름을 떠올렸다고 최 대표는 전했다.

수만명의 국군포로들이 북한의 최하위 성분에 속해 각종 차별을 받으며 오지의 탄광·광산에서 대를 이어 강제 노동에 시달린다는 얘기는 간헐적으로 전해져 왔지만, 이들과 20년 동안 가깝게 지낸 북한 인사가 국군포로의 명단과 그 가족 관계를 구체적으로 증언한 건 처음이다. 북한인권시민연합 등의 조사에 따르면, 개천군과 인접한 북창군 18호 관리소 탄광지대에 강제 동원된 정치범과 국군포로들은 매일 3교대로 24시간 석탄 생산에 내몰린다고 한다. 교대 근무를 마친 뒤에야 식권이 제공되는데, 그나마도 하루 할당량(채탄공의 경우 약 10t)을 채운 경우에만 허용되고, 휴일은 한 달에 하루다. 이들의 자녀들은 오전에만 학교에 나가고 오후엔 철로에 떨어진 석탄 줍기에 동원된다고 한다.

Y씨가 이들의 생사를 마지막으로 파악한 건 2005년이었다고 한다. 구씨를 제외한 8명이 당시에도 생존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16년이 흐른 지금 이들의 생존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 대표는 “정부가 국군포로 문제의 시급성을 절감하고 지금이라도 북측에 생사 확인 요청을 비롯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