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외교부 장관(앞줄 가운데)이 지난 5월 11일(현지 시각) 과테말라 안티구아에서 열린 카리브국가연합(ACS) 각료회의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 장관 뒷편에 있는 인사가 호세피나 비달 쿠바 외무부 차관(빨간 원 안)이다. /외교부

정부가 쿠바와 수교를 다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구 1100만명의 중남미 공산국가인 쿠바는 시리아·코소보 등과 더불어 한국의 몇 안 되는 미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60년 외교 관계를 수립한 오랜 우방인데 한국과 수교가 성사되면 그 의미가 작지 않을 전망이다. 국제 무대에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고 핵폭주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계기로 양국 외교장관 회담을 갖는 방안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2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과테말라에서 열린 국제회의를 계기로 쿠바의 호세피나 비달(Josefina Vidal) 외무부 차관과 비공개 회동을 갖고 수교를 제안했다. 제3국 주선으로 극비리에 성사된 이 면담은 현안을 특정하지 않은 채 1시간 넘게 진행됐다. 외교 소식통은 “쿠바 측에서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었지만 수교 문제를 놓고 진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며 “한국의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자 긍정적으로 응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고 했다.

쿠바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지만, 1959년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혁명을 계기로 한국과 교류를 단절했다. 1960년 수교한 우방 북한과 ‘참호를 공유한다’는 특수 관계가 양국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경제·문화 교류가 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외교 당국이 직접 수교와 영사 관계 수립을 번갈아 제안하며 20년 넘게 공을 들여왔다. 양국 간 적의(敵意)가 없고 민간 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제반 여건에 따라 수교가 성사될 가능성이 크다.

◇ 쿠바에 공들인 20년… 9월 뉴욕 외교장관 회담 추진

2016년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왼쪽)이 한국 외교 수장으로는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해 아바나 세보네이 컨벤션궁에서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무부 장관과 회담을 갖고 있다. /조선일보DB

서반구 유일 공산국가인 쿠바는 반세기 동안 함께 반미(反美) 기치를 내걸었던 북한의 ‘형제 국가’다. 하지만 김씨 일가와 유대가 돈독했던 카스트로 형제의 통치가 종식된 후 양국 간 교류·협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쿠바의 수교가 성사되면 국제 무대에서 북한이 느끼는 외교적 고립감과 초조함이 깊어질 수 있다. 외교부는 이 점이 북한의 핵 폭주에 유효한 압박 수단이 될 수 있다 보고 관계 개선에 힘을 쏟고 있고, 윤석열 대통령의 수교 의지도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정부가 북한을 의식해 영사 관계 수립이나 통상대표부 상호 개설을 제안하는 데 그쳤던 것과 달리 윤석열 정부는 쿠바에 정식 수교 의지를 여러 차례 전달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 계기 외교장관 회담을 제안했지만 쿠바 측이 거부했고, 개발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우리 정부 대표단의 쿠바 방문이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월 핼러윈 참사 당시 쿠바에서 위로 메시지를 보내 전기를 마련했다. 11월 외교부 중남미국장이 쿠바를 방문해 외무부 관계자에게 장관 명의로 된 친서를 전달해 사의를 표했다. 이어 5월에는 박진 외교부 장관의 카리브국가연합(CAS) 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고위급 회동까지 성사된 것이다. 외교부는 9월 유엔 총회 계기 장관급 회담을 통해 관계 정상화와 수교 문제에 대한 후속 논의를 이어가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2018년 쿠바 정상 방북 때, 김정은이 직접 공항 나와 - 2018년 1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한 미겔 디아스카넬(가운데)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을 영접하고 있다. 쿠바는 2019년 국가평의회 의장 명칭을 대통령으로 바꿨고, 디아스카넬 대통령은 현재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쿠바와 수교하면 북핵 문제 해결 등 한반도 현안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고, 경제·개발·기후변화·관광·에너지 등 여러 분야에서 실질적 협력이 가능한 상대라 판단한다”고 했다. 양국은 미수교 상태지만 문화·관광 등 비(非)정치 분야에서 교류를 꾸준히 확대해 왔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 5년(2014~2019년) 동안 쿠바를 찾은 한국인 관광객은 5000명에서 1만5000명으로 3배가 됐다. 쿠바 내 한국 드라마, K팝 팬클럽 회원이 5000명이 넘고, 지난해 8 수도 아바나에 개교한 한글 학교 수업에 현지인 100여 명이 몰리는 등 한국에 대한 쿠바 국민의 인식도 긍정적인 편이라고 한다. 재작년 기준 양국 교역액은 2600만달러(약 355억원)에 불과했지만 앞으로 늘어날 여지가 크다.

하지만 수교 성사와 관계 정상화에 이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과제가 많다. 북한의 ‘방해 공작’도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2016년 6월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이 한국 외교 수장으로는 처음 쿠바를 방문할 당시 북한 김영철 등이 직전에 쿠바를 찾아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며 견제에 나선 적이 있다. 전직 외교부 간부는 “북한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되면 역효과가 날 수 있다”며 “쿠바와 수교하는 일은 중남미에 새로운 외교 거점을 마련한다는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