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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아무래도 한국보다 운전하는 시간이 깁니다. 라디오 블룸버그 뉴스 채널을 항상 듣습니다. 코너가 넘어갈 때마다 경쾌한 목소리로 매체 브랜드 캠페인 문구가 소개됩니다. 인상적입니다.
“컨텍스트 체인지스 에브리싱(Context Changes Everything·맥락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만 뽑아 특별한 통찰력을 갖게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점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점과 점을 이어 선을 만들고 선들을 또 이어보면 안 보이던 무엇가의 윤곽이 드러납니다.
취재 현장을 잠시 떠나 워싱턴 D.C.에 연수 온 지난 8개월 사이 ‘촉(觸)’이라고 하지요? 직관적으로 ‘이거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낀 뉴스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①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후임자 미임명(1월)
②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폐지(4월)
③미 민주·공화당 모두 새 강령서 ‘북한 비핵화’ 삭제(8월)
④IAEA 사무총장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표현 논란(9월)
⑤중견 4성 자리 주한미사령관에 3성 지명 및 주일미사령관 4성 격상 검토(9월)
다섯 개의 점을 이어보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북핵 문제가 ‘메인 메뉴’가 아니라 ‘사이드 메뉴’로 점점 비켜나는 듯한 선이 보입니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 중요도, 관심이 다운그레이드(downgrade·격하)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①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후임자 부재
미 국무부는 지난해 말 성 김 인도네시아 대사 겸 대북특별대표가 퇴직을 했는데 인도네시아 대사의 후임은 새로 임명하면서도 한국에는 아주 중요한 대북특별대표의 후임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10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자리는 공석입니다.
안 그래도 한 때는 부장관급이었던 대북특별대표 직을 2021년 미 정부는 인도네시아 대사였던 성 김 대사에게 ‘겸직’하라고 해 외교가가 술렁였습니다. 미 외교 정책 순위에서 한반도가 밀려난 것 아니냐는 우려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겸직하는 사람도 없고 미임명 상태가 됐습니다. 아직 ‘부’대표가 있어서 업무가 끊긴 것은 아닙니다만, 이 부대표는 미 국무부에서 과장급입니다. 게다가 몽골 업무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공식 직책명이 ‘한국·몽골 담당 과장’입니다.
이런 상황을 북한과 협상도 없고, 북한이 대화의 장으로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미국이 북한에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상대로 강경책이든 유화책이든 어떤 쪽으로든 일을 만들 의지가 없고 ‘현상 유지’ 정도에 만족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영향 탓인지 한국 외교부도 올 3월 한반도평화교섭본부라는 조직을 없앴습니다. 대신 외교전략정보본부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외교 업무는 특성상 동등한 급의 카운터 파트(상대)가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북핵 문제에 있어 최대 협력국인 미 국무부에 한반도 담당 고위급 인사가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 외교부도 한반도본부를 유지하고 싶어도 하기 애매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한반도 이슈의 현주소를 짐작케 합니다.
②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폐지(4월)
외교부를 출입하던 시절 딱 이맘 때인 9월말 10월초만 되면 잔뜩 기대했던 것이 있습니다. ‘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보고서’인데요.
공식 발간 전 외교부는 담당 국장을 통해 출입 기자단에 보고서 핵심 내용 등을 미리 설명해주곤 했습니다. 물론 이런 사전 브리핑을 하고 엠바고(보도유예)가 잡히기 전에 미리 제재 보고서를 입수해 ‘단독’보도하는 민완 기자들도 있었습니다.
대북 제재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매년 3월과 9월말(10월초) 2차례에 북한의 제재 위반 사항을 정리해 국제사회에 알립니다. 김정은이 인민들의 굶주림을 외면하고 수백만달러의 외화로 최신 벤츠 세단, 렉서스 SUV, 각종 사치품 등을 밀반입한 사실들이 바로 이 패널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이 중국이나 러시아 선박 등을 통해 석탄이나 원유 등을 불법 환적하는 실태들도 대북 제재위 패널 보고서를 통해 다수 공개됐습니다.
주요국 전문가들이 참여한 권위있는 보고서입니다. 각국 정부가 주의깊게 살펴보고 세계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합니다. 보고서 내용이 국제사회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제재 준수의 중요성을 환기시킵니다. 괜히 어겼다가는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웁니다.
2019년 3월 대북제재위 보고서에서는 김정은이 메르세데스 벤츠 리무진 차를 2018년 방북한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함께 탄 사진을 실으며 북한의 벤츠 밀반입 사실을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외교부는 ‘불량국가’ 북한의 제재 위반 사례를 고발하는 유엔 보고서에 한국 대통령의 얼굴 사진이 제재 위반자 김정은과 나란히 실린 사진을 빼려고 로비했다가 실패해 논란이 되기도 했지요. 무엇보다 제재 위반 증거 사진에 한국 대통령이 실린 것 자체가 큰 망신이었습니다. ‘제재위 독립성을 훼손했다’ ‘불량국가가 하는 행태를 한국이 한 꼴’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유엔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제재 위반 실태를 조사하고 보고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할을 하는 제재 보고서가 올해 4월 보고서를 끝으로 발간 중단됐습니다. 3월 28일 표결에 부쳐진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 결의안이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돼 버린 것입니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계기로 출범한 대북 제재위 전문가 패널이 15년만에 폐지된 것입니다.
전문가들은 “독립적으로 대북 제재 위반 사항을 조사하고 분석해 알리는 기구가 사라져버렸다”면서 “대북 제재가 제대로 이행되는지 감시하고 점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능 하나가 상실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대북 제재는 불법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는 북한의 견제하는 대표적인 수단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제재의 위상과 효력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한국 정부와 주유엔 한국 대표부는 이번에 대북제재위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 결의안이 부결될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대응했는지 사전에 파악은 했는지 의문입니다.
설사 이를 막지 못하더라도 사전에 그런 동향을 파악해 여론전을 펴서 부결을 시키려는 측을 압박하고 국제사회의 도움을 최대한 끌어내는 등 발빠른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직 외교부 차관은 “한국으로선 15년간 이어진 유엔 대북제재위 패널 보고서가 중단된 것은 뼈 아픈 일이고 큰 외교적 무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면서 “큰 실책으로 어떻게 됐는지 면밀히 파악해 유사한 일이 또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③미 민주·공화당 모두 새 강령서 ‘북한 비핵화’ 삭제(8월)
미국에서 ‘정당 강령(Party Platform)’은 정당의 이념과 정책 목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서입니다. 정당의 핵심 이슈에 대한 입장을 공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 민주·공화 양당이 오는 11월 대선을 앞두고 마련한 새 정당 강령에서 북한 비핵화(denuclearization)라는 문구를 모두 삭제했습니다. 북한의 핵개발이 더 고도화하는 현실을 보면 북한 비핵화는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인데, 미 정강에서 해당 문구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여전히 양당은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다고 구두로 확인하지만, 정강에 문구로 들어가는 것과 말로만 외치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깜박하고 안 넣은건지 북한 비핵화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봐서 그런건지 아니면 북핵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좋은 소식’ 아닌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④IAEA 사무총장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 표현 논란(9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공식 석상에서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라고 표현한 것도 현재 국제사회의 분위기가 북한의 핵보유 자체는 인정하고 ‘군축’으로 협상의 방향을 바꿔야한다는 것 아닌가 의심케 합니다.
러시아 외무장관도 북한 비핵화 개념은 “종결된 이슈(closed issue)”라고도 했지요. 대북 제재위 패널 연장 결의안을 부결시킨 것도 그렇고 러시아는 요새 북한을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있습니다.
⑤중견 4성 자리 주한미사령관에 3성 지명 및 주일미사령관 4성 격상 검토(9월)
미 대통령은 지난 11일 제이비어 T. 브런슨 육군 중장을 신임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지명했습니다. 상원 인준을 받아 임명될 예정입니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고 이상했습니다. 보통 주한미군사령관은 4성 육군 대장 보직을 마치고 2차 보직으로 임명되는 자리인데, 이번에는 3성 중장을 지명했습니다. 지명자는 상원 인준을 받아 공식 임명될 때 대장으로 진급될 예정입니다. 중견 대장이 맡는 주한미군사령관 자리를 갓 대장 계급장을 단 이가 맡게 됐습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직책이 총 4개입니다. 주한미군사령관, 한미연합군사령관, 유엔군사령관, 주한미군 선임장교를 모두 겸하는 특별한 자리입니다. 군복에 다는 휘장도 4개입니다. 북한의 도발 등 한반도 상황도 관리해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군사 활동도 챙겨야 합니다. 미 육군 대장 임무 중 막중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맥락을 살펴보면 여느 지역보다 긴장해야 하는 곳입니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현 사령관인 폴 라캐머라는 2019년 대장으로 진급해 태평양육군사령관을 지내고 2021년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임명됐습니다.
그의 전임한 로버트 에이브럼스도 2015년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전력사령관을 지냈다가 2018년 주한미군사령관이 됐습니다. 그의 전임 빈센트 브룩스도 태평양 육군사령관으로 대장 보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주한미군 총책임자가 됐습니다.
그 전에 스캐퍼로티처럼 1차 대장 보직으로 주한미군에 온 경우가 아예 없었던 것 아니지만, 이번에 유독 신경 쓰이는 건 이번 주한미군사령관 후보자 지명 이전에 미국에서 흘러나온 ‘주일미군사령관 4성 격상 검토’ 소식입니다.
미국과 일본은 지난 7월말 일본에 ‘통합작전사령부’를 창설하고 이에 발맞춰 기존 주일미군사령부를 미국 인도태평양사령부 예하의 통합군사령부로 개편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미 통합군사령부(주일미군사령부)의 사령관을 4성 장군 자리로 만들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주일미군사령관이 기존 3성에서 4성으로 격상되는 것입니다.
미일 군사 동맹이 대폭 강화되는 것이고 미국의 인태 전략에서 일본의 가치가 커졌음을 시사합니다. 당장 4성 자리를 신설하는 건 쉽지 않아 이번에 바로 추진되지 않을 수 있지만, 향후 주일미군사령관 자리에 4성이 올 가능성은 커보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가치가 내려가고 주일미군은 올라가는 것 아니냐는 말도 조심스럽게 나옵니다. 바로 붙어있는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 미 4성 장군이 둘 다 오는 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이 성주 사드 기지 배치 논란 등과 같이 정권에 따라 정책 일관성이 흔들리는 한국보다는 장기적으로 인태 전략의 무게추를 일본에 두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한미동맹은 최상의 상태로 끌고 간다는 인상은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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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략적 가치 키우지 않으면 위태
미 새 지도자를 뽑는 대선까지 이제 한달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대선 후보 토론회, 선거 유세에서 공화당 후보인 도널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한 등 한반도 이슈를 두 세 차례 과거 김정은과 협상했던 경험을 계기로 언급한 것 말고는 양당에서 북핵 문제를 제대로 논의하는 걸 보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하루에도 수차례 언급되는 것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카말라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든 트럼프가 되든 미국의 고립주의 기조는 정도의 차이와 추진 방식의 세련미가 다를뿐 그대로 유지될 듯합니다. 주목할 건 고립주의의 새 장을 연 트럼프 행정부 때도 미국의 대이스라엘 군사 원조, 외교적 지원은 줄기는 커녕 더 늘었다는 점입니다. 고립주의는 전 세계의 경찰 국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기에 내 편은 더 확실히 챙길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지금 어느정도 일까요? 1953년 초일류기업 미국이 아직 매출 실적도 거의 없는 신생 기업 한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강한 파트너십을 맺었습니다. 든든한 후원자를 둔 한국은 그 뒤로 주가가 가파르게 올랐습니다.
우상향은 계속 이어질까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한 때 잘 나갔던 K반도체에 대한 회의론은 짙어져만 가고, 안보 측면에서도 북핵 문제는 나아지긴커녕 더 위태로워졌습니다.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같은 기존의 문법으로는 통하지 않을 정도로 정세도 복잡해졌습니다.
해리스와 트럼프 둘 중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한국에 더 유리한가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얼마 전 한인타운이 있는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모 한식당에 갔다가 이 문제를 놓고 쌍욕하면서 싸우는 분들도 봤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고 왜 저러실까?’ 에티켓 생각이 나면서도 나라 걱정이 오죽하면 저러실까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듣다보니 양측의 공통점은 있었습니다. 한국의 국력이 정치든 산업이든 뭐든 이대로 가면 ‘피크(정점)’를 찍고 내리막 길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미 대통령이 누가 돼야 극복의 기회를 잡을 수 있고, 누가 되면 있던 기회도 놓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대선 결과가 나왔을 때 한식당을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추신
뉴스레터 외설(外說)을 연재한 지 1년이 됐습니다. 구독자 4000명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1년간 뉴스레터 57편, 뉴스사이트에 공개되지 않고 메일로만 전달 드리는 ‘워싱턴 D.C.에서 보내는 사적인 레터’ 10편을 썼습니다. 총 67편입니다.
올 1월부터 미 연수에 들어가 ‘외설’을 중단해야하나 잠깐 고민도 했지만, 이런 것이 무엇보다 꾸준히 일관되게 한다고 생각됐고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고 자진해서 좋아서 하는 것이었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이어왔습니다.
뉴스레터 1년에 대한 소회를 ‘사적 레터’로 썼습니다. 레터를 읽으시려면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됩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휴가 중 읽은 책 ‘민주주의의 깨어남(Democracy Awakening)’ 등 국내 미번역 외서 다수권에 대한 글도 다 모아 레터에 정리했습니다.
☞뉴스레터 ‘외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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