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4차 대유행 사태를 맞으면서 정부의 코로나 컨트롤 타워가 누구인지 새삼 논란이 일고 있다. 청와대는 자기들이 컨트롤 타워가 아니고 정부 각 기구가 컨트롤 타워라고 했다. 당초 문재인 대통령이 수차례에 걸쳐 “청와대가 재해·재난의 컨트롤 타워”라고 했던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정부 각 기구 중 코로나 방역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다. 작년만 해도 정 청장이 사실상 코로나 대응의 책임을 지고 지휘하는 ‘코로나 차르’로 불렸다. 하지만 청와대가 갑자기 기모란 방역기획관을 임명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 청장의 역할과 입지는 축소되고 기 기획관이 방역 전반에 대한 지휘관으로 비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이번 4차 대유행 사태가 터졌다. 과학적 판단에 근거한 거리두기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에 따른 방역 조치가 이뤄지면서 ‘K방역 체계’가 근본부터 흔들린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정부 내에선 지난 4월 임명된 기 기획관이 정 청장보다 높은 위치에서 정부의 코로나 방역을 총괄한다는 평가가 나왔다. 직급으로 보면 기 기획관이 1급으로 차관급인 정 청장보다 낮지만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직접 보필해 방역 전략을 짠다는 점에서 기 기획관이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것으로 비쳤다. 작년 코로나 사태 초기부터 방역을 총괄해 온 정 청장이지만 외부에 대놓고 자기 의견을 밀어붙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하게 자기 소신을 밝히되 웬만하면 주변과 부딪히지 않고 원만하게 일을 처리하려 했다. 초기엔 문 대통령도 이런 정 청장에게 힘을 실어줬고 정 청장도 비교적 매끄럽게 차르 역할은 수행했다.
하지만 각종 선거 국면에서 정 청장의 소신은 청와대와 여당의 바랐던 방역의 방향과 조금씩 엇나갔다. 청와대와 여권은 K방역의 성과를 홍보하고 경기 회복을 위한 거리두기 완화와 소비 진작을 위한 재난지원금 지급 등을 부각시키려 했다. 철저한 코로나 방역과는 궤를 달리하는 정책들이었다. 정 청장이 이에 명시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지만 정치권의 요구에 쉽게 따라가지도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관계자는 “청와대와 여당으로선 정 청장이 고지식하고 답답하게 여겨졌을 것”이라며 “그래서 보다 유연하고 여권과 소통이 잘 되는 방역 지휘관이 필요했고 그래서 발탁한 사람이 기 기획관”이라고 했다.
기 기획관 임명 이후 정 청장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차르 정은경’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정 청장도 청와대나 총리, 다른 부처 장관들과 갈등을 빚거나 입장차가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코로나 차르’의 입지는 사라지고 일선 방역 집행기관 중 하나로 역할이 축소됐다. 청와대와 총리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시녀 기관’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이번 코로나 4차 대유행 직전에도 거리두기 완화나 소비진작용 재난지원금 지원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청와대 등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는 질병청과 정 청장 의견에 크게 귀를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기 기획관이 코로나 방역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방역 현장에 나오지도, 브리핑을 하지도 않은 채 청와대에서만 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기 기획관이 질병청과 중대본, 다른 정부 부처 등에서 올라오는 코로나 방역 관련 보고와 정보를 취합해서 문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확실하다. 문 대통령의 귀를 잡고 대통령의 지시를 일선에 하달하는 게이트 키퍼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정보를 정확하게 정치적 고려나 가감 없이 제대로 문 대통령에게 전달했느냐는 것이다.
정부 안팎에선 기 기획관이 문 대통령이 듣기 좋아할만한 정보,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게 하는 보고는 적극적으로 올리고, 비관적이고 듣기 싫은 보고는 빼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돼 왔다. 왜냐하면 문 대통령이 걸핏하면 “코로나 터널의 끝이 보인다” “백신 수급이 차질없이 이뤄지고 있다” “경기 회복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현실과 동떨어진 발언을 해왔기 때문이다. 기 기획관을 비롯한 참모진이 그런 비현실적이고 왜곡된 보고서를 올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문 대통령이 근거 없이 낙관적 전망이나 자화자찬을 쏟아낼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기 기획관은 교수 시절에도 “백신 도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며 친여적 발언과 행태를 보여왔다. 정권에 유리한 말, 문 대통령이 듣기 좋아할 얘기만 해왔다는 평가다. 이런 점이 부각돼 초대 방역기획관에 발탁된 것이란 시각도 있다. 기 기획관의 아버지가 신용복 전 교수와 함께 통혁당 사건으로 복역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신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평소 가장 존경한다고 말해온 인물이다. 기 기획관은 대학에서 예방의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암 관련 연구를 주로 해왔다. 코로나 방역 전반을 지휘하기엔 경험과 전문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문 대통령과 코드가 맞다는 점이 평가돼 발탁됐을 가능성이 높다. 기 기획관이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에도 문 대통령의 코드와 심기에 맞는 정보를 취합해 올리고 거기에 맞는 방역 조치를 내렸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즉 ‘과학 방역’ 보다는 ‘코드 방역’에 초점을 맞추는 ‘코로나 정치 차르’ 역할을 했을 것이란 얘기다.
기 기확관은 이번에 4단계로 완화한 새로운 거리두기를 입안하고 추진하는 데도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이번 조치는 중앙 부처와 지자체 등이 집단 지성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부인했다. 청와대와 기 기획관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집단 지성’까지 갖다 붙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기모란의 책임을 부인하고 감싸줘야 하는 것이냐는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만큼 청와대 내에서 기모란의 입지가 강하고, 문 대통령의 신임이 두텁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기 기획관이 책임지고 물러나게 되면 문 대통령의 인사 잘못이 다시 부각되고 그동안 자랑해온 ‘K방역 성과’도 무너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문 대통령이 절대 기 기획관을 물러나게 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기 기획관과 함께 청와대 내 코로나 대응의 핵심 라인은 이진석 국정상황실장이다. 그는 울산선거 공작 사건에서 대통령의 30년 친구 송철호 울산시장이 당선되도록 공약을 만들어주고 선거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됐다. 선거 공작은 국가 기본 틀을 흔드는 중대 범죄다. 기소되면 당연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이 실장이 코로나 대응 책임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석달 넘게 유임시키고 있다. 이 실장이 있는 동안 4차 대유행이 오고 백신 부족 현상은 심해졌다. 사태는 악화됐는데 주무 책임자는 그대로 두겠다는 것이다.
대국민 사과도 책임 인정도 안하는 문 대통령이 이 실장과 기 기획관을 자를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한다. 아무리 코로나 방역에 실패하고 백신 부족 사태가 발생해도 ‘내가 임명한 사람’ ‘내 편’은 절대 건들지 않는 문 대통령의 ‘오기·코드 인사’가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코로나 컨트롤 타워는 실종되고 대응 시스템도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질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