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폴란드에 수출하는 K2 전차와 K9 자주포의 초도분(1차 수출 물량)이 현지에 도착한 직후 열린 인수 행사에 폴란드 대통령과 부총리 등 정부 및 군 고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전력화 행사가 아닌 해외 무기 초도분 도입 행사에 군 통수권자까지 참석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폴란드가 느끼는 위기감과 한국산 무기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폴란드 국영방송 TVP 등 폴란드 언론에 따르면 6일(현지 시각) 안제이 두다 대통령과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부총리 겸 국방장관은 폴란드 북부 그디니아에 있는 해군 기지에서 열린 초도 물량 인수 행사에 참석해 한국산 무기 도착을 환영했다. 이날 인도된 초도 물량은 K2 전차 10대와 K9 자주포 24문이다. 그디니아는 수도 바르샤바에서 차량으로 4시간 떨어진 곳이다. 한국 측에선 엄동환 방위사업청장과 현대로템, 한화에어로스페이스 대표 등이 참석했다.
두다 대통령은 “현대식 장비를 갖춘 군(軍)만이 러시아 제국의 야망과 잔인함을 막을 수 있다”면서 “침공과 적을 막기 위해 군이 이 같은 장비를 갖추는 것은 필수적”이라고 했다. 두다 대통령은 “러시아의 침공과 우크라이나 전쟁 국면에서 한국 무기의 신속한 인도는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한국산 무기의 현지 도착은 지난 7월 말 1차 계약을 체결한 지 4개월여 만이다.
폴란드는 올 들어 한국 방산 업체들과 K2 전차 1000대, K9 자주포 672문, FA-50 경공격기 48대, 천무 다연장로켓 288문 등에 대한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폴란드 무기 수출은 2030년대 초중반까지 단계적으로 이뤄진다. 폴란드와의 1차 계약은 120억달러(약 15조6000억원) 수준이다. 정부 소식통은 “탄약과 후속 군수 지원 등 전체 물량을 포함하면 총규모는 400억 달러(약 52조여 원)에 달할 전망”이라고 말했다.
폴란드가 대통령까지 나서 한국산 무기 1차 물량 환영 행사를 연 것은 폴란드군의 전력 공백을 메울 필요성이 그만큼 시급하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폴란드군은 자국(自國) 전차와 자주포, 장갑차 등을 대거 우크라이나군에 제공했다. 이에 따른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갭 필러’(Gap-Filler) 무기 도입을 추진했지만 미국·독일 등은 몇 년가량 걸릴 것으로 예상됐고, 한국만큼 폴란드가 원하는 시기에 빨리 무기를 공급할 나라는 없었다. 군 소식통은 “신속한 공급과 뛰어난 가성비가 한국 무기를 선택한 이유”라고 전했다. 실제로 계약 체결 후 4개월여 만에 전차·자주포 등을 제공한 것은 국제 무기 거래 관행상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1차 물량 도입 행사와 관련, 우리 측에선 한국 내에서 훈련받은 폴란드군 장병들이 K2 전차 등을 직접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겠다는 의견도 개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폴란드 측은 그럴 경우 행사 시기가 이달 말로 늦어진다며 항구 도착 시기에 맞춰 하자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 이날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K2 전차의 경우 폴란드군 30명이 현대로템 등에서 6주간 교육을 받고 이달 귀국하며 K9 자주포는 폴란드 현지서 교육이 이뤄질 예정이다. 브와슈차크 장관은 이날 행사에서 내년에도 추가 물량이 차례로 도착할 예정이라며 “폴란드 장병들이 이미 한국에서 장비 운영 숙달을 위한 훈련을 진행 중이고 폴란드 육군을 강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폴 양국은 대규모 무기 거래를 계기로,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한국산 무기의 제3국 진출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브와슈차크 장관은 지난달 29일 한-폴란드 방산 협력 콘퍼런스에 참석해 “한-폴 방산 협력을 통해 양국 방산 업계는 공동으로 제3국 시장 진출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 말했다. 최대 국영 방산 업체인 PGZ 흐바웩 회장도 “신뢰에 기반한 한-폴 방산 협력은 양국 방산 업계가 더욱 발전할 좋은 기회”라며 “이를 활용해 공동으로 제3국 시장 진출을 모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방산 수출은 ‘폴란드 대박’에 힘입어 지난달 말 170억달러를 돌파했으며 이달 말까지 200억달러 돌파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세계 방산 4위 진입 목표를 공언하기도 했다. 미국·유럽 등 세계 유력 언론들도 한국 방산의 놀라운 성장세에 주목하며 잇따라 보도하고 있다. 미 CNN은 “한국은 2012∼2016년 1%이던 점유율을 최근 5년간 2.8%로 늘리며 상위 25개국 중 가장 큰 증가폭을 보였다”며 “4강으로 향하는 길을 이미 잘 걷고 있다”고 지난달 보도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7∼2021년 세계 방산 수출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2.8%로 8위였고 4위 중국 4.6%, 5위 독일 4.5%, 6위 이탈리아 3.1%, 7위 영국 2.9%로 격차가 촘촘하다. 2012∼2016년과 2017∼2021년의 점유율을 비교한 5년간 성장세는 한국이 177%로 2017∼2021년 점유율 상위 25국 가운데 독보적 1위였다.
한편 폴란드의 이 같은 태도는 문재인 정부 시절 공군 F-35 스텔스기 1호기 출고식에 방위사업청장과 공군참모총장이 불참하는 등 북한 눈치를 보며 ‘쉬쉬’했던 태도와 대비된다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