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 D.C. 중심지에는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이 있습니다. 지난 14일 다녀왔습니다. ‘국립’답게 무료였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미술관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사진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미셸 오바마 등 역대 영부인 대형 인물화 및 사진도 있었고, 정치인뿐 아니라 오프라 윈프리 등 방송·연예인, 그리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연방 대법관 등 각분야 유명 인사 관련 흉상 등 각종 예술 작품이 있었습니다.
미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오슬로 협정을 맺어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이츠하크 라빈 전 이스라엘 총리, 그와 함께 노벨상을 받은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남아공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을 이끌며 인종차별에 맞섰던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제도를 종식하고 만델라에게 자리를 물려준 프레드릭 데 클라크 전 대통령 등 중동·아프리카 등 세계 각국의 유명 인사 사진이 펜화, 유화 등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은 보관된 작품이 수십만 점이 넘어 주기적으로 전시 작품을 바꿔주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마존 창립자죠, 제프 베조스의 초상화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새 작품들까지 들어와 미술관 보관소에는 작품이 차고 넘칩니다.
많은 화가, 각국 주요 인사 관련 재단 등이 소장 작품을 미 국립초상화 미술관에 기증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주목도 높은 미 워싱턴 D.C.의 국립 미술관에 작품이 걸린다는 것만한 ‘공공외교’도 없기 때문입니다.
2시간 정도 미술관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한국인은 초상화는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미국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지만 미국과 관련한 한국인이 하나 둘이 아닌만큼 이들의 초상화가 있을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특히 미국에게 한국은 아주 특별한 동맹입니다. 워싱턴 D.C. 한복판에 6·25(한국)전쟁 추모공원이 따로 조성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혈맹이기 때문입니다.
전쟁 중 미국 군인 3만6000여명이 북한, 그리고 이들의 배후였던 구소련·중공의 남침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론 6·25전쟁 당시 미군과 함께 국군을 이끈 백선엽 장군 등의 멋진 초상화나 흉상이 이스라엘 등 다른 나라 지도자들, 주요 관료, 군인들처럼 미 초상화 미술관에 자리할만 합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을 이끌어내고 6·25를 이겨낸 뒤 1953년 기적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한미동맹의 근간을 마련한 우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 및 흉상은 이 곳에 당당히 전시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런데 이럴수가? 미술관 측에 물어봤더니 전시 중인 한국인 초상화 작품은 단 하나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나마 세계적 미디어 아티스트죠, 고 백남준 작가의 작품과 이 작품에 대한 설명란에 그의 사진 몇 점이 작게 실린 게 전부였습니다.
조사를 해봤더니, 한국인 인물화는 전시장에는 없고 창고 보관소에 있는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미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소장 작품 목록을 검색해보니 한국인 6명의 인물 그림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배우, 대학교수 등 2명,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역대 대통령 3명이었습니다. 역대 한국 대통령 작품이 일부 있긴 하구나 싶었는데요.
자세히 더 살펴보니, 우리 한국 정부나 한국 작가가 정식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46년 전인 1978년 미 시사잡지 타임(TIME)이 잡지 표지로 사용한 그림 약 800점을 일괄 기증했는데, 여기에 끼어있던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보리스 찰리아핀 등 미국인들이었습니다.
A4용지 크기의 잡지 표지에 사용된 그림들이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작은 이것마저도 전시 상태가 아니었고, 창고 어딘가 쌓여있었습니다.
굳이 여기에 그런 게 걸릴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각국의 공관이 몰려있고, 학계와 언론, 그리고 기업 및 문화 예술가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정치 1번지’에 대한민국 인물들의 사진 변변찮은 것 하나 없다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입니다.
팩트는 신성합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 분명한 과실이 있다는 팩트를 지울 수 없습니다. 대학에 들어간지 한달이 막 됐을 무렵 선배, 동기들과 긴 행렬을 지어 수유리 4·19 민주 묘지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생생합니다. 3·15 부정선거는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팩트는 신성합니다. 이승만은 나라가 주권을 잃었을 때 당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세워진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초대 대통령, 즉 건국의 아버지였습니다. 혼탁한 정국에서 그는 대한민국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이끌었습니다. 분명한 공로입니다.
3주 전 서울을 떠나 워싱턴 D.C에 오기 전 ‘서울의 봄’을 흥미롭게 봤습니다. ‘건국전쟁’이 한창 인기라는데 아직 이곳 미 동부에서는 볼 길이 없습니다. 버지니아에서 교민분들은 접하는데 건국전쟁 보고 싶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극장에서 한국 영화 마음껏 보실 수 있는 점은 분명 부러운 일입니다.
공공외교의 손이 더 뻗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에서 몇 자 적었습니다. 이상 뉴스레터 ‘노석조의 외설’였습니다. 외설 구독자님, 감사드립니다.
추신) 우리 작가가 그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대형 초상화를 올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기념일(10월 1일) 같은 날을 계기로 삼아 미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 기증하면 어떨까요? 그런 기증이 있다면 미술관도 흔쾌히 받고 전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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