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한 대행은 이날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신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했다./뉴시스

한덕수 권한대행이 8일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2명을 지명하면서 내세운 표면적 이유는 ‘헌재 기능 마비를 막겠다’는 것이다. 오는 18일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후임 없이 퇴임하면 헌재는 6인 체제가 돼 최소 두 달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된다. 이 때문에 한 대행이 그동안 보류했던 마은혁 헌법재판관 임명과 함께 2명의 새 재판관(이완규 법제처장,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지명으로 헌법재판소 9인 체제를 복구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한 대행이 헌법재판소의 보수·진보 구도를 염두에 뒀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현재 헌재 구도는 이날 임기를 시작한 마은혁 재판관을 포함해 ‘보수·중도 4, 진보 5’이다.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퇴임하고 이완규·함상훈 후보자가 합류하면 구도는 ‘보수·중도 6, 진보 3’으로 바뀌게 된다. 반면 민주당 주장대로 한 대행이 대통령 몫 재판관 2명을 지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될 경우 헌재는 ‘보수·중도 4, 진보 5’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의회 권력을 민주당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향후 ‘견제’를 고려한다면, 한 대행이 탄핵 압박을 감수하더라도 재판관 지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국무회의 주재하는 韓대행 - 한덕수(오른쪽에서 다섯째) 대통령 권한대행이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한 대행은 이날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신임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국무총리실

한 대행은 이날 두 재판관 지명을 발표하며 “사심 없이 오로지 나라를 위해 슬기로운 결정을 내리고자 최선을 다했다”며 “제 결정의 책임은 오롯이 저에게 있다”고 했다. 한 대행은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부장판사는 각각 검찰과 법원에서 요직을 거치며 긴 경력을 쌓았고, 공평하고 공정한 판단으로 법조계 안팎에 신망이 높다”며 “두 분이야말로 우리 국민 개개인의 권리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동시에 나라 전체를 위한 판결을 해주실 적임자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 대행은 “제가 오늘 내린 결정은 그동안 여야는 물론 법률가, 언론인, 사회 원로 등 수많은 분의 의견을 듣고 숙고한 결과”라며 “법적 검토를 거친 뒤 오늘 오전 동료 국무위원들의 의견을 마지막으로 여쭙고 결정을 실행에 옮겼다”고 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17년 당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인용된 뒤 이선애 헌법재판관을 임명했었다. 다만 이 재판관은 대통령이 아닌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명한 후보자였다. 한 대행이 후임을 지명함에 따라 국회는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20일 안에 심사를 마쳐야 한다. 국회가 거부하면 대통령(대행)은 10일 내에 기일을 정해 청문경과보고서 재송부를 요청한 후 후임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한 대행의 재판관 지명을 비판했지만, 국민의힘은 환영 메시지를 냈다.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한 대행이 두 재판관을 지명한 건 용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구여권은 한 대행이 대통령 몫 재판관을 임명하지 않으면, 입법·행정은 물론 사법 영역까지 민주당 성향으로 기울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였다.

국민의힘 일각에서는 이날 한 대행이 민주당의 반대 속에서 헌법재판관 지명을 밀어붙인 것을 계기로 ‘한덕수 대선 후보설’을 띄우는 분위기도 나타났다. 윤상현 의원은 정부서울청사에서 한 대행과 만난 뒤 “한 대행 대선 출마를 주장하는 분들이 많고, 저한테 물어봐 달라는 사람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지역적으로나 안정감, 풍부한 국정 경험이라든지 여러 면에서 좋은 카드”라고 했다. 박수영 의원도 “이번 선거의 최대 화두는 경제”라며 “한 대행은 통상교섭본부장과 주미 대사 등을 지낸 전문가”라고 했다. 다만 한 대행은 총리실 간부들에게 “대선의 ‘ㄷ’ 자도 꺼내지 마라”며 대선 출마 문제를 언급하지 말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다만 정부 안팎에서는 한 대행이 평소 국정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미국과의 통상 전쟁 등을 대응하기 위해 대선에 나서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