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전 대통령이 11일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떠나 서초동 사저로 거처를 옮기며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윤 전 대통령이 ‘새로운 길’을 언급한 것은, ‘사저 정치’ 등의 방법으로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결정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란 해석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대통령실 관계자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오후 한남동 관저에서 정진석 대통령비서실장, 성태윤 정책실장,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등 대통령실 수석비서관급 이상 참모들과 20여 분간 작별 인사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윤 전 대통령은 “임기를 끝내지 못해 아쉽다”며 “모두 고생이 많았다. 많이 미안하고, 그동안 감사했다”고 말했다. 윤 전 대통령을 배웅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관저로 온 대통령실 직원 200여 명에게는 “국가 발전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와 사회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며 “감정을 수습하고, 자유와 번영을 위해 더욱 힘써 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자신을 지지하고 나선 일부 청년을 염두에 두고 “비상 조치 이후 미래 세대가 엄중한 상황을 깨닫고 자유와 주권 가치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돼 다행”이라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은 같은 시각 변호인단을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해 “지난 2년 반 우리 국익과 안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며 “지난겨울 많은 국민, 청년들께서 자유와 주권을 수호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없이 한남동 관저 앞을 지켜주셨다. 추운 날씨까지 녹였던 그 뜨거운 열의를 지금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고 했다. 이어서 “이제 저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겠다.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을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와 함께 경호 차량을 타고 관저를 빠져나오다 정문 앞에서 내려 걸어 나와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관저 정문 앞 도로 양옆에는 지지자 2000여 명(경찰 비공식 추산)이 모여 있었다. 지지자들은 태극기를 들고 “윤 어게인” “탄핵 무효”를 연호했다. 윤 전 대통령은 대학교 야구 점퍼를 입은 젊은 지지자들과 포옹하거나 악수하고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일부 지지자는 “대통령님 죄송합니다”라며 오열했다. 윤 전 대통령은 지지자가 건넨 빨간 모자를 쓰기도 했다. 모자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선거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변형한 ‘한국을 다시 위대하게’(MKGA)가 적혀 있었다. 윤 전 대통령은 5시 13분 차에 다시 오르고 나서도 차창을 열어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인사했다.
윤 전 대통령이 탄 차량은 오후 5시 29분 사저가 있는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건물 앞에 도착했다. 건물 앞과 로비에는 지지자 500여 명과 국민의힘 윤상현·김석기·강승규·강명구·박성훈·임종득 의원, 변호인단 석동현·김계리 변호사, 한국사 강사 전한길씨 등이 모여 있었다. 차에서 내린 윤 전 대통령이 지지자들과 악수했고, 뒤를 따르던 김 여사는 꽃다발을 받았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경호관들의 경호를 받으며 사저로 들어섰다. 2022년 11월 7일 사저에서 관저로 옮긴 지 886일 만, 파면된 지 일주일 만이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관저에서 키우던 반려견과 반려묘 11마리도 모두 데려갔다. 다만 이날 반려동물들의 모습이 노출되지는 않았다.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수석대변인은 “국민과 국회, 헌법에 의해 파면된 윤석열은 마지막까지 단 한마디의 사과나 반성도 없었다. 누가 보면 명예롭게 임기를 마치고 퇴임하는 대통령인 줄 알겠다”라고 했다. 국민의힘은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다만 구 여권 일각에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을 자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국민의힘 원내 관계자는 “계엄 이후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당내 혼란을 가까스로 수습 중이고, 대선에 집중하지 않으면 민주당에 모든 권력을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당내 정치인들이 ‘윤심’과 거리를 둬야 하고 윤 전 대통령도 당분간 현실 정치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원내 관계자도 “윤 전 대통령과 친소 관계를 떠나, 선거 국면에서의 득실을 전략적으로 따져봐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