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잘만든 몇시간 짜리 호러영화도 실제 상황을 담은 몇분 분량의 조악한 동영상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꾸밈없는 100퍼센트 현실상황만큼 섬뜩함을 유발하는 극적 장치는 없거든요. 전세계 관객들을 매료시켰던 납량영화의 고전 ‘죠스’ 시리즈를 수백편 만들어봐야 상어의 적나라한 사냥이 담긴 수십초짜리 동영상에 비할바가 못됩니다. 바로 이 가련한 물범의 최후가 담긴 동영상처럼요. 이번에 소개해드릴 동영상 역시 심장이 약하신 분은 건너뛰시길 권합니다. 2018년 7월 크리스 팔레르모(Chris Palermo)라는 사진가가 미국 북동부 메사추세츠주 노셋 해변 인근에서 촬영해 인스타그램에 올려서 최근 동물 동영상 사이트 ‘로링어스(Roaring Earth)’에 소개된 장면입니다.
올리브빛 물결치는 바다에 물범 한마리가 힘겹게 물을 가르고 있습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과 특유의 기다란 수염까지 보이는 이 물범은 그러나 생애 최후의 유영을 하고 있습니다. 방금 포식자 백상아리로부터 일격을 당했거든요. 날카로운 상어 이빨에 몸뚱아리의 절반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물범은 어쩌면 한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플라나리아처럼 잘라내면 두마리가 되는 원시적인 무척추동물이 아닌 한, 타임머신을 작동해 시간을 몇분앞으로 되돌릴 수 없는 한, 이 불쌍한 물범이 살아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걸 녀석도 뒤늦게 깨달은 것일까요. 자신의 숨통을 옥죄어오며 주위를 빙빙도는 포식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프구나. 어서 빨리 끝내다오.”
그 말이 상어의 귀에 들어간 것일까요? 이윽고 주변을 뱅뱅돌던 상어가 다시 아가리를 쩍 벌린 뒤 물범의 몸뚱아리를 물고 거칠게 흔듭니다. 이 참상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저 이 물범이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삶을 마감하기를 기원하는 것일테죠. ‘죠스’의 원작자 피터 벤츨리는 자신의 소설이 영화화된뒤 상어가 무분별하게 남획되는 상황을 괴로워해 상어 보호 운동에 일생을 바쳤다고 하죠. 하지만, 조스보다 더 섬뜩한 이 짧은 동영상에서 우리는 상어라는 족속에 대해 근원적 공포감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동영상은 생태적 측면에서 포식자로 또한 피식자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는 물범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물속에선 날랜 수영선수지만, 뭍에서는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움직이는 이 족속들을 통틀어서 기각(鰭脚)류라고 해요. 지느러미발을 가진 짐승족속이라는 뜻이죠. 푸근하고 친근한 생김새이지만, 이래뵈도 사자·호랑이·늑대와 같은 식육류, 즉 맹수무리입니다. 그런데 똑 같은 지느러미발을 가진 수중 포유동물이면서 온순하기 그지없는 초식동물 무리가 또 있어요. 듀공과 매너티 등이 속해있는 바다소(해우) 무리인데, 기각류와는 전혀 다른 족속입니다.
기각류에는 크게 세 개의 분파가 있습니다. 코끼리처럼 멋진 상아를 갖고 있는 북극의 거인 바다코끼리파, 바다사자와 강치 등도 아우른 물개파, 그리고 물범파이지요. 엄니로 확실히 구분되는 바다코끼리와 달리 물범과 물개는 얼핏 구별이 쉽지 않아보이는데요. 우선 물범의 경우 몸색깔이 상대적으로 옅고 점박이 무늬인 경우가 많은데 비해 물개류는 주로 칙칙한 갈색 계열입니다. 몸의 빛깔말고도 확연히 다른 점이 있는데요. 물범은 뭍에서 이동이 훨씬 서툴러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그 통통한 몸을 위아래로 꾸불텅대면서 기어다니곤 합니다.
그래도 천상 사냥꾼입니다. 종류에 따라서는 최대 수심 100m까지 자맥질을 하면서 물고기와 오징어·게 따위를 먹습니다. 남극에 사는 표범무늬물범은 몸길이가 4m까지 이르는 제법 큰 물범인데 주식은 펭귄입니다. 잔혹한 사냥법으로 악명높아요. 일단 펭귄을 잡는데 성공하면 입에 문채로 거칠게 흔들었다 내동댕이쳤다를 되풀이하면서 만화책에 나올법한 펭귄의 오동통한 몸뚱아리를 피가 흥건하고 너덜너덜한 고깃덩이로 만들어놓습니다. 유튜브 ‘one wild world’에 올라온 표범무늬물범의 펭귄 사냥 장면입니다.
펭귄이 물범의 저녁거리로 희생되는 장면 속에 물범이 상어의 일격에 삶을 마감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됩니다. 잔혹하지만, 그렇게 거대 바닷속의 생명의 바퀴가 먹고 먹히는 동력으로 굴러가는 것이죠.
물범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동물은 또 있습니다. 현존하는 지상 최대의 곰이면서, 기후변화의 최대 희생자로 꼽히는 북극곰이죠. 기후 변화로 급속도로 서식지를 잃으면서 민가에 출현해 음식물 쓰레기를 뒤진다는 뉴스까지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물범을 사냥할 때 북극곰의 모습은 맹수이면서 야수이자 괴수 그 자체입니다. 얼음구멍으로 숨을 쉬기위해 바다표범이 머리를 들이밀 때 어마어마한 앞발의 힘으로 후려쳐 두개골을 박살냅니다. 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접근해 전광석화 같은 기습공격도 벌이죠. 정말 찰나의 차이로 북극곰의 매복공격이 성공을 거두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은 BBC 어스의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물범중 가장 덩치가 작은 종류는 바닷물이 아닌 민물(러시아 바이칼호)에만 서식하는 몸길이 1.3m짜리 바이칼물범이에요. 반면 가장 덩치가 큰 종류는 발정기 수컷들의 피터지는 파트너 쟁탈전으로 유명한 코끼리물범(몸길이 수컷기준 최대 6.5m)입니다. 색깔도, 몸집도, 습성도 다양한 종류들이 오늘도 무언가를 잡아먹고 있을 것이고, 또 무엇인가에게 먹히고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생태계의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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