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선생 봉환 미 교포 장익태씨부부/68년 딸과 인연 유해관리
11년째/사업 뒷전 보훈처 등과 교신 열달/유족-미 당국 반대로 한
때 애태워 "그동안 유해 봉환을 추진하면서 좌절과 의견차이를 많이
겪어 현지에서 봉송식을 올리기 전날까지도 마음을 죄었습니다." 4일
오후 서재필박사 유해봉환단과 함께 서울에 도착한 장익태씨 부부(58)
는 "잊혀져 가던 서박사 유해를 성대히 모셔온 우리 정부와 국민에게
깊이 감사한다"며 활짝 웃었다. 장씨는 83년3월부터 서박사의 미국
내 유족 서동성 변호사(60.LA거주)와 공동명의로 박사의 유해를 관
리해 왔다. 장씨는 서박사 와 인연을 맺은 때를 지난68년쯤으로
기억한다. 필라델피아에 볼일차 들른 서씨와 함께 미디아시에 살고 있는
박사의 둘째딸 뮤리엘 제이슨여사(84년 사망)를 찾아 뵌 것이 계기
가 됐다. "따님은 아버지에 대한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해방후 아버지
와 함께 귀국했을때 우리 국민이 보여준 박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즐
겨 기억하고 얘기했지요." 장씨는 이후 뮤리엘 여사의 유일한 친구로,
서박사 유해의 장래문제를 놓고 서로 깊숙이 토의해 왔고, 83년에는
뮤리엘 여사의 청에 따라 자신의 돈으로 서박사 유해를 필라델피아의
납골당으로 이전하기도 했다. 뮤리엘여사와의 친교 및 서박사 유해 봉
송에는 부인 황휘자씨(52)의 정성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해 성탄
절에 방문했을때 뮤리엘 여사는 수도도 고장나고, 페인트가 다 벗겨진
허름한 사택에서 거실에만 간신히 불을 피워놓고 있었습니다." 83년
유해 이전하기도 황씨는 이후 두아들과 함께 잡채와 불고기 등 한국
음식을 자주 장만해 드렸고, 한국교회의 행사때면 여사를 모시고 가기도
했다. 황씨는 "민족의 어른이란 생각에, 사업도 젖혀두고 유해봉환
문제를 놓고 10개월씩 보훈처와의 국제전화-팩스에 매달리는 남편을 돕
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서박사 유해 봉환작업은 어렵
기만 했다. 우선 뮤리엘 여사가 "내가 사망하기 전에는 안된다"고 주
장해 온 것. 또 이후 몇차례의 추진에서도 국내 안장지 등을 놓고 논
의단계에 맴돌다 수포로 돌아가 장씨를 애타게 했다. 작년6월부터 시
작된 장씨의 이번 유해봉환작업의 가장 큰 애로점은 오랜 이민생활에서
비롯된 그의 형편없는 글솜씨. 장씨는 또 한국내 마땅한 당사자를 몰라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 모두에 진정서를 띄울 때마다 지인인 서울대
교수에게 자문해야 했다. 이렇게 오간 수십통의 편지-팩스들에는 절차
와 봉송위원회 구성 등에 대해 정부측과 필라델피아 교민들간에 수정과
번복을 거듭한 내용이 그대로 수록돼 있다. 또 막판에는 서박사의 유
일한 외손자(첫째딸 스테파니 제이슨의 아들) 필립 하디칸씨(93년3월
사망)의 유언도 큰 걸림돌이 됐다. "책임진다" 각서 하디칸씨는
그동안 한국정부의 성격을 문제삼아 국내봉환을 반대해 왔었다. "묘지
측이 외손자의 유언을 문제삼아 이장을 허락치 않았을 때는 정말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탓에 장씨는 LA의 서동성씨와 함께 "모든 법적
책임을 공동 부담하겠다"는 각서까지 써야 했다. 8일에 있을 서박
사의 국립묘지 안장식을 지켜본뒤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인 장씨 부부는
"이제야 민족앞에 큰 짐을 던 것 같다"고 했다. 이철민기자 * 두
분 유해 서울 모셔오던 날/"이젠 큰짐 덜어 " 유족들 감격/공항
승객들 숙연히 운구행렬 지켜봐/기장 "위대한 독립지사 함께간다" 정숙
당부/전 의사 딸 "선친 고국에 모시게돼 감사" 승객들 추념의 정
표시 미국 LA를 출발한 서재필박사와 전명운의사의 유해는 4일
오후2시25분 대한항공 06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국군의장대원
10명이 도열하는 가운데 국제선 2청사 18번 출구를 통해 고국에 첫
발을 디뎠다. 유해를 실은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대한항공측은 일
반 승객들을 먼저 내보냈으며 마지막으로 유해와 유족, 봉환단원들을 맞
았다. 고인들의 영정, 훈장, 유해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차례로 운구병
들의 손에 들려 입국장을 빠져나갔으며, 봉환단장인 김시복보훈처차장,
서박사의 종손인 서희원전이대교수(70), 전명운의사의 딸 전경령씨(7
1)등 유족들이 엄숙히 뒤따랐다. 고인들의 유해가 청사 밖을 나서자
귀빈주차장 입구에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영덕통일원장관, 이충길
보훈처장, 김승곤광복회장, 장기욱국회보사위원장 등 출영인사들이 고개를
숙여 추념의 정을 표시했다. 또 마침 공항에 있던 여행객들과 출영객
들도 "유해봉환단이 지나는 동안 경건하게 추념의 정을 표시해 달라"는
공항공단의 안내방송에 따라 숙연한 모습으로 운구행렬을 지켜보며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 환국을 반겼다. 이어 고인들의 영정과 유해는 오후3
시 광복회원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등 2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각
3대의 운구차에 실려 경찰 기동순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립묘지로 향했
다. "모실곳 모셔 기뻐" 지난해 8월 박은식선생 등 임정요인
5위에 이어 이날 드디어 고인들의 유해가 봉영되자 유족들은 감회에
어린 모습이었다. 서박사 유족대표인 서희원씨(70)는 "갑신정변이 실
패한뒤 미국으로 망명하시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며 "늘 마
음에 걸렸는데 큰 짐을 벗은 셈이 됐다"고 소감을 말했다. 또 서재
필박사의 유해를 모신 납골당을 20여년 관리해오면서 이번 봉환에 큰
역할을 했던 장익태씨(58)는 "응당 모실 곳에 모시게 됐으니 기쁘면
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다"고 말했다. 국제의원연맹(IPU) 총회에 참
석했다 합류, 함께 입국한 민주당 류준상의원도 "서박사의 고향인 전남
보성이 지역구이므로 관심이 많다"며 "사람들과 힘을 모아 독립기념관
에 서박사의 어록비를 건립하는 문제를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 국립묘지에서 있은 유해 안치식은 이부총리, 이보훈처장,
유족대표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여분만에 종료. 두분의 유해를
모신 6대의 군용지프는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현충관)에 도착, 두분
의 유해및 영정, 훈장의 순으로 국립묘지 의장대 20명이 도열한 가운
데 현충관에 차례로 모셔졌다. 이어 유해봉환위원회 위원장인 이부총리
, 장기욱국회보사위원장, 유족대표 등이 차례로 분향했다. 미국 LA에
살고 있는 전의사의 딸 전경령여사는 안치식이 끝난뒤 "선친이 고국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도와준데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전여사는
한때 수녀로서 60년대 초부터 15년간 우리나라에서 선교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발전 30분간 예배 미국 LA에서 2일 저
녁 합류한 서재필박사-전명운의사 유해봉환단은 3일 새벽4시(현지시각)
인근 윌셔연합감리교회에서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애국지사 두분에 대
한 넋을 기린데 이어 출발에 앞서 공항귀빈실에서 30분간 간단한 출발
예배를 드렸다. 또 대한항공측은 두 애국지사의 유해가 탑승한뒤 기
내방송을 통해 "오늘 우리나라의 위대한 독립지사 유해를 모시고 함께
서울로 향하고 있다"며 승객들에게 엄숙을 당부했다. 한편 두 분의
유해를 각각 유가족이 모시고 오는 바람에 이들의 좌석 등급이 달라져
전의사측 유족들이 항의, 뒤늦게 두분 유해를 모두 비지니스 클래스인
위층 좌석으로 옮기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박사의 유해는
5일 서울 및 광주시내에서 시가행진을 한뒤 생가가 있는 전남 보성군
용암리를 방문, 6일 구용상전남도지사 집전으로 용암리 기념관에서 생가
봉영 의식을 갖고 7일 서울로 돌아올 예정이다. 또 전의사의 유해는
6일 국립묘지를 떠나 광주시가행진을 하며 전남 담양군 향교리 시조선
산을 방문, 노제 등을 지낸 뒤 이날 오후 국립묘지로 돌아오게 된다.
국립묘지측은 5일부터 7일까지 참배기간동안 각급 기관, 단체는 물론
일반인들의 많은 참배가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용원-권상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