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카드 대반격 선택/"더이상 당할수만 없다" 마지막 안간힘
/평생 반공 일관한 회교이론가 그동안 수세에 몰려있던 보스니아 회교
도 정부군이 15일 새벽을 기해 1만5천여 병력을 동원, 사라예보시
근교에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공격을 개시했다. 알리야 이제트베고비
치(70) 보스니아 대통령은 공격과 함께 발표한 성명에서 "국제사회는
명백한 재난을 방지하기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며 "보스
니아 정부군은 사라예보가 질식사하는 것을 막기위해 예방적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보스니아정부군의 대공세는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선택인지도 모른다. 보스니아 정부군은
92년 내전 발발후 세르비아계의 압도적인 무력에 밀려 영토의 70%이
상을 세르비아계에 빼앗겼다. 보스니아 북부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에 의
해 회교도 인구의 90%가 줄어들 정도로 비참한 인종청소 를 당했다
. 국제사회는 이처럼 당하고만 있는 보스니아 회교도들에 대해 동정심을
표시하면서도 세르비아계의 침탈을 억제할만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
았다. 이때문에 이번 대공세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영토를 수호하려는
회교도 지도자 이제트베고비치 대통령의 비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일생을 반공으로 일관해 온 투철한 회교민족주의자이다. 1925
년 보스니아 북부 보산스키에서 출생한 그는 10대때부터 보스니아내 회
교도의 권리를 옹호하는 청년 회교도 클럽에서 활동했다. 사라예보대
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중 46년 회교활동에 연루돼 3년동안 복역했다.
출감후 그는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회교 연구에 몰두, 다수의 회교관련
서적을 저술했을 정도로 뛰어난 회교 이론가이기도 하다. 회교도의
지도자로서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70년에 발표한 회교도 선언(I
slamic Mani-festo) . 50여 페이지 분량의 이 논문에
서 그는 "회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에서만 진정한 회교도의 질서가
세워질 수 있다"고 주장, 가장 바람직한 현대 회교국가의 모델로 파
키스탄을 들었다. 당시 유고정부는 이 논문을 근거로 그를 "다른 인종
을 박해하고 회교도만의 국가를 세우려는 분파주의자"로 규정했다. 유
고 공산정권은 82년 이 논문을 트집잡아 그를 반혁명분자로 분류, 그
에게 12년형을 선고했으나 공산주의의 붕괴로 89년 풀려났다. 출감
후 정치일선에 나선 그는 90년 회교민주행동당(SDA)을 창당, 보스
니아 회교도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당시 보스니아의 회교도 인
구는 전체인구의 43%. 수적으로 우세한 회교도의 지원으로 SDA는
그해 실시된 선거에서 전체 2백40석 중 86석을 획득, 최대 정당
으로 등장했으며 이제트베고비치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으로서 조
화를 이룬 다민족 국가를 구성해보려던 그의 이상은 세르비아계와 크로아
티아계가 무장세력으로 변하면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9
2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평화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계에 의해 납치돼 하루만에 구출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93년에는 그가 이끄는 회교도가 전 영토의 31%만 차지하도록 하는
중재안을 강요당할 정도로 회교도들의 세력은 눈에 띄게 약화됐다. 세
르비아계에 일전을 선포한 지금 그로서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끄는 것과
함께 서방세계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나토와 유엔등이
사태가 악화될 것을 우려, 벌써 정부군의 공격을 비판하고 나섰기 때문
. 그가 과연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금수해제등 서방의 지원을 끌어내고
세르비아의 무력을 극복해 내는가에 따라 그의 정치생명은 물론 보스니
아 회교정부의 운명이 결정날 것으로 보인다. 이하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