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만든 통영갓 한 개 값은 얼마쯤 할까.

정답은 3백만원이다. 물론 1∼2만원짜리 플래스틱 모조갓도 있다. 그러나
요즘 제대로 만든 통영갓을 한 개 구입하려면 티코 한 대 값을 주어야 한
다.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갓 가격은 왜 이렇게 비싼가. 그렇게 비싼 갓을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 쓰
고 다녔을까. 도대체 갓이 그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인가.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지금은 수요가 거의 없어 제품의 비용 부담이 크
고, 한 개 만드는데 5∼6개월이나 걸리는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통영갓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단 한사람 밖에 없다.

정춘모씨(56)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하필 왜 갓 일
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수 없이 받았다는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저도 가끔 왜 내가 갓 일을 시작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운
명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제 의지 탓도 좀 있는 것 같고….』.

%%%% 머리카락 굵기의 죽사와 말총이 갓의 재료 %%%%.

갓 만드는 일은 상상을 넘어서는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갓
만드는 일이 철저하게 분업화 돼 있었다. 기술자의 이름도 원통형의 위꼭
지 부분을 만드는 「총모자장」, 도너츠 모양의 둥근 테두리를 만드는 「양태
장」, 그리고 이 둘을 결합, 그 위에 천을 대고 마무리하는 「입자장」 등으
로 나뉘어져 있었다.

총모자장은 말총을 이용해서 「총모자」만 짜고, 양태장은 대나무를 머리카
락 굵기의 가는 실(죽사)로 만들어 창을 짜는 일만 한다. 서로의 영역을
넘보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돼 있었다. 정씨는 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
호로 저정된 유일한 입자장이면서도 갓 완성품을 만들고 있다. 「총모자장」
은 85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의 김인옹(76)이 있으나, 통영갓 완성
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으로는 정씨가 유일하다.

정씨는 갓의 부품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 총모자도 직접 만드는데, 양태
한 개 만드는데 두 달, 총모자 한 개 만드는데 최소 한달이 걸린다고 한
다. 양태는 머리카락 굵기의 죽사를 네 가닥으로 엇갈려 꼬면서 만든다.죽
사 이음매가 손에 만져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함의 극치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갓 한 개를 만드려면 평균 5∼6개월이 소요된다. 특히 진사립이란 고
급품은 한 개 만드는데 일년 가량 걸린다. 갓은 일년에 3∼4개쯤 팔린다.

통영갓은 4백년전 이순신장군이 통영의 삼도수군통제영내에 만들었던 13
공방 중 10번째 공방이었던 입자장에서 출발했다. 그후 임금이 쓰는 어립
을 만들 정도로 기술이 뛰어났던 통영갓은 조선 팔도에서 최고로 꼽히던
갓이었다.

『3백년전 당시 최고의 장인이 3년 동안 만들었다는 어립은 지금 도모방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은 기술입니다. 신기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
습니다. 장인의 혼이 들어 있습니다.』.

과거에는 수요가 많고 분업이 잘 돼 있었기 때문에 가격이 그리 비싸지
않았지만 지금은 정씨 혼자서 다 만들어야 하고 수요도 없기 때문에 값이
비쌀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요즘 정씨가 만드는 갓은 최하 3백만원 선이고,
정성들여 만든 갓은 5백만∼1천만원까지 호가한다. 그러나 돈을 아무리 줘
도 갓을 갓을 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만들어주지 않는다
고 한다.

운명과 의지. 이 두 가지는 씨줄과 날줄처럼 정씨의 갓 인생을 짜 왔다.

1940년 경북 예천에서 빈농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씨는 비슷한 처지의 사
람들이 대개 그랬듯이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농사일을 돕다 고향
을 떠나 도회지인 김천으로 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18살 때였다.

그러나 시골 소년을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막노동도 해보고 점
원도 해보았지만 밥도 제대로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우
연히 갓 만드는 집을 지나치게 된다. 어릴 때 고향 마을에 있던 갓 만드는
집에 가끔 구경을 다녔기 때문에 생소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갓 공방에 취직했다.

『눈썰미와 끈기가 있었던 탓인지 남보다 빨리 기술을 배웠습니다. 노력도
곱절로 했지요. 남들이 사흘 동안 할 일을 저는 하룻만에 해치웠습니다.』.

남들보다 두세 배 일을 더한 만큼 돈벌이도 괜찮았다.

%%%% 25세때 갓 공방 차릴 정도로 성공 %%%%.

이곳에서 자신감을 얻은 정씨는 대처인 대구로 진출, 규모가 꽤 큰 갓 공
방에 일자리를 얻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을 갓 장인으로 이끄는 첫번째 운
명과 만난다.

그 공방에는 당시 통영갓의 3대 기술자로 손꼽히던 김봉주, 고재구, 모만
환 세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 60을 넘은 노인들이었만 64년
모두가 갓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던 탁월한 장인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정
씨는 할아버지뻘인 이들 세 사람으로부터 통영갓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 전에 갓 일을 배웠지만 통영갓은 완전히 새로 시작하듯이 배웠습니
다. 보통 갓과는 차원이 다른 갓이었습니다.』.

4년여 동안 번 돈으로 그는 25세 때 대구 달성공원 앞에 「입자공업사」란
갓 공방을 차리면서 독립한다. 기술자들을 박절하게 대하던 주인에게 환멸
을 느낀 그의 스승들이 정씨에게 『자네가 공방을 차리면 우리가 옮겨가서
일해주겠다』는 제의, 이에 힘을 얻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최고의 기
술자를 확보한 그의 갓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에서 중간 상인들이 찾
아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다른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70년대 들어 근대화 바
람이 시골에까지 본격적으로 불어 들면서 갓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것이
다. 도시 지역부터 갓의 수요가 뜸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으로 경북 안
동, 예천에서도 갓을 사가는 촌로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의 나이 32살
나던 해에 결국 갓방은 문을 닫았고, 그의 스승들은 고향인 통영으로 발길
을 돌렸다. 정씨의 인생은 또 하나의 갈래길을 만난다.

『서울에 와서 보석감정원에서 6개월간 보석감정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러
나 막상 보석감정원을 내려고 하니 어쩐지 내키지가 않아요. 그래서 포기
하고 다시 대구로 내려갔습니다. 통영에 계신 선생님들께 편지를 썼더니
「아무도 갓 일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다. 자네가 제자가 되는
게 어떠냐」는 답장이 왔더군요. 꼭 그러겠다는 결심은 없었지만 발길이 통
영으로 향했습니다.』.

통영에서 얼마간 머물던 그는 74년 『일단 갓 기술은 다 배우자. 비록 갓
일로 돈을 벌지는 못하겠지만 나이들어 한 가지 할 일이 있어야 할 게 아
닌가』하는 생각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전수장학생으로 공식 등록했다.공
식적으로 갓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한 달에 고작 수당 1만원 받는
문화후계자 생활은 고달팠다. 갓을 만들어봤자 일년에 겨우 서너개 팔릴
정도여서 아예 돈벌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는 스승들이 작고하면
갓 기술을 배울래야 배울수가 없다는 절박한 심정 때문에 기를 써서 기술
을 배웠다. 79년 고재구옹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면서 전수장학생 정씨
한 명만 달랑 남고 4백년을 이어온 통영갓 기술자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 때 정씨는 또한번 운명과 부딪히게 된다.

『정말 암담하더군요. 갓 일은 계속해보았자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들 것은
뻔한 일이었죠. 당연히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대구에 떼놓고 온 처자식을
생각해서라도 돈벌이를 시작해야 되는 처지였습니다. 더욱이 통영사람들은
통영갓 기술자들이 다 사망하고 난 뒤 외지 사람이 통영갓 기술을 전수 받
은데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여겼고 노골적으로 배척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러나 돈을 벌러 서울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 한 구석
에서 「네가 떠나면 누가 갓의 명맥을 이을 것이냐」는 목소리가 자꾸 들려
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고민하는 동안 세월은 4년이 흘렀다.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괴로운 나날들을 대구와 통영을 오가며
낚시를 하면서 달랬다.

84년 그는 오랜 고민을 끝내고 갓 일에 인생을 걸기로 최종 결심을 하고
서울로 향했다. 「의지」가 「운명」으로부터 정씨 인생의 방향타를 넘겨받은
셈이었다.

서울에 온 정씨는 자수 금속공예등 민속공예가 12명과 공동 출연, 강남구
삼성동에 문화재 전수회관 부지에 가건물을 짓고 갓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91년 그는 중요무형문화제 제4호로 지정받는다. 79
년 고재구옹이 별세한 이후 12년만에 갓 무형문화재가 대를 잇게 된 것이
다.

%%%% 갓 판 돈으로 사둔 땅이 갓 인생의 밑천 %%%%.

그러나 그는 자신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또다른 운명이 그의 뒤를 따라왔
다는 사실을 50세 넘어서 알게 된다. 그는 갓 일로 번 돈으로 27살 되던
해 대구 변두리에 과수원 2천5백평을 샀다. 그후 다른 곳에 땅을 좀 샀다
가 얼마 후 생계를 위해 팔아버렸으나 이 땅은 가치가 없어 그냥 내버려두
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부동산 붐을 타고 땅값이 꽤 올랐다. 87년 이
땅을 팔아 서울 논현동에 1백여평의 땅을 구입, 상가건물을 하나 지을 수
있었다. 여기서 나오는 수입이 한달에 몇 백만원에 달했고, 남부럽지 않게
살수 있는 생활의 바탕이 돼주었다.

『운명이 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갓만 만들어서 팔았다면 지
금쯤 굶어죽었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일찌감치 다른 직업을 찾았을 겁니
다. 또 땅값이 좀 더 일찍 올랐으면 아마 땅을 팔아서 다른 장사를 했을겁
니다. 그런데 젊어서 갓을 팔아서 번 돈으로 사두었던 땅이 나도 모르는
새 값어치가 올라 지금까지 갓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고 생각
하면 묘한 기분이 듭니다. 부동산 붐이 통영갓의 맥을 잇게 해준 공신이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지나온 삶을 회고하면 운명과 의지가 교차되는 인생의 묘미를 느낄 수 있
다면서 미소를 짓던 그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갓 일의 대를 이을 후계자가 아직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갓을 자신의 명예처럼 소중히 다뤘습니다. 그래서 가난해
도 갓은 귀한 것을 사 썼지요. 갓에는 조선조 선비들의 예의범절, 줏대와
체면, 꼿꼿했던 자존심과 같은 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술과 함
께 그 정신이 맥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무형문화재인 제가
매달 정부에서 65만원씩을 받습니다. 갓은 일년에 서너개쯤 팔릴까 말까한
데 남는 것은 없습니다. 전수장학생이 되면 한 달 수당을 10만원씩 받습니
다. 그런 사정을 알면서 대를 잇겠다고 나설 젊은이가 있을지….』.

그러면서 『언제쯤 갓 일을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저 문을 밀고 들어올 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며 문쪽을 바라보는 정씨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얼
핏 스쳤다. .

<> 정춘모씨 약력

1940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

1953년 예천서북국민학교 졸업

1958년 갓 일 배우기 시작

197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갓) 전수장학생 등록

199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지정

1994년∼ 한국전통공예가협회 초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