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선태씨, 정창원 소장 기록 「755-815년설」 반박---
### 「화엄경론 경질」서 발견 신라 4개촌락 생활상조사 자료 ###
### 불교 변화상황-정창원 입고과정 따져 추론 ###.

「신라촌락문서」의 제작시점에 대한 기존학계의 주장을 통렬히 반박한 논문이 발표돼 국사학계에 충격을 던지고 있다. 진단학보 최근호에 실린 윤선태씨( 국사학과 박사과정)의 「정창원 소장 신라촌락
문서의 작성연대」다. 윤씨는 하타다의 「서기 755년설」, 북한의 박시형
등이 주장한 「815년설」을 조목조목 반박한 뒤, 이 문서가 695년에 제작됐음을 밝히고 있다.

1933년 동대사 정창원에 보관된 「화엄경론제칠질」(화엄경론 제7질·질은 여러권짜리 책의 보관이나 운반을 위해 종이를 여러 장 덧대 만든 일종의 보따리)에서 발견된 2장짜리 「신라촌락문서」는 4개 촌락에
대해 이름과 규모, 호구, 소나 말의 보유상황 등을 기록한 자료. 신라의 민지배체제와 사회경제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신라촌락문서」의 제작시점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전제가 있다.
문서에 제작시점이 「을미년」으로 기록돼 있으며 지역명칭으로 「서원경」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서원경은 685년에 설치됐으므로, 이 문서는 685년이후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의 어느 을미년에 작성됐다. 제작
시점은 695, 755, 815, 875, 935년 중 하나다.

윤씨는 「신라촌락문서」의 정창원 입고과정과 「화엄경론」의 유통과정을 세세히 살펴 이 문서가 695년에 제작됐음을 추론한다. 수많은 논문과 자료를 동원한 탓에 얼핏 산만해 보일 수도 있지만, 695년을 제외한
나머지 네개 연도가 왜 제작시점이 될 수 없는가를 역으로 살펴본다면
이해가 쉽다.

3년마다 새로 작성된 이 문서에는 3년 사이의 호구변동을 정정한 기록이 보인다. 신라는 935에 멸망했으므로, 935년은 자연 탈락한다.

이어 「755년설」. 서기 8세기 중반 신라의 각종 기록에는 해를 나타내는 단어로 「연」 대신 「재」를 쓴다. 중국은 744년부터 758년까지 해를
표시하는 말로 「재」를 쓰도록 칙명을 내렸는데, 신라도 이를 따른 것.
현존하는 당시 신라의 각종 기록은 예외없이 「재」를 사용하고 있다.
「을미년」이라는 표현에서 755년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남는 것은 현재 학계의 「다수설」인 815년과 875년, 695년이다.

윤씨는 제작시점으로 9세기가 타당하지 않음을 당시 불교의
변화상황을 통해 밝힌다. 이 논점을 이해하려면 「신라촌락문서」는 북위의 영변이 저술한 「화엄경론」 사경(책 내용을 통째로 베낀 것)의 보관을 위해 만든 질 제작에 재활용됐음을 기억해야 한다. 신라는 평균
20년정도 국가문서를 보관했으므로, 신라촌락문서는 최소한 사경보다
20년 이상 앞서 제작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따라서 질에 보관됐던 사경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면, 신라촌락문서의 제작시점도 유추할 수 있다.

문서 제작 시점을 815년으로 잡는다면, 사경은 9세기 중반기에야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794년 개막된 헤이안시대의 은 화엄종과는
다른 파인 천태와 밀교가 불교계를 주도했기 때문에 「화엄경론」에 대한 수요는 많지 않았다. 이는 914년 승려 원초가 작성한 「화엄종
장소병인명록」(화엄종장소병인명록)에서 「영변의 화엄론(사경) 1백권
중 50권만이 (에) 있다」는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화엄경론」 사경이 9세기 중반기에 최초로 제작된 뒤 학승들이 다시 베껴 에 퍼졌다면, 1백년이 채 안돼 50권만이 남았을 리 없다. 따라서 정창원에
보관됐던 「화엄경론」 사경은 9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남는 것은 695년 뿐이다.

진단학보에 이 논문을 소개한 노태돈 교수(국사학)는 『가장
구체적으로 「신라촌락문서」의 제작연대를 추적한 논문』이라고 평했다.

최근 이 논문을 의 연구자들에게 전달한 송기호교수()는
『의 불경 유통과정에 대한 부분은 학자들의 검증이 필요하지
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라며 『통일신라시대의 사회변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하는 논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