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이 막 얼어붙던 그해 11월,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밀고 내려
왔다. 설마 하던 어머니는 짐을 꾸렸고, 외양간 누렁이, 3대째 물려쓰
던 칠보장롱, 책보퉁이 다 팽개치고 피난길에 올랐다.

"3개월뿐이래요, 이 겨울 지나믄 돌아올 기야요."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온 고향집.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 더 돌아보기라도 했을텐데. 북쪽
하늘 바라보며 휑한 가슴을 달래는 사람들이 있다.

광복절이다, 추석이다, 피난 내려와 낳고 기른 자식들과 함께 있어
도 마음의 나침반은 항상 북쪽인 실향민들이다.

날래 갔다 날래 오라우, 맞잡은 손 못놓으시던 어머니는 살아계실
까, 등교길에 늘어선 키 큰 전나무들은 여전히 푸를까, 떠나던 날 영문
모르고 컹컹 짖던 점박이는 오래전에 죽었겠지….

45년 8월15일 광복이후 시작된 월남행렬은 47년2월 북한에 공산정
권이 들어서면서 가속화했다. 3년뒤 일어난 한국전쟁은 엄청난 규모의
'엑소더스'를 몰고왔다. 상당수는 유엔군이 북한에서 퇴각하던 50년11월∼
51년1월에 내려왔다.

'바람찬 흥남부두' 첫 수송선은 50년 12월2일 강원도 묵호항으로
떠났고, 이듬해 1월4일 끝난 서울 철수는 '1·4후퇴'라는 말을 남겼다.

'38선을 넘어와 하릴없는 처지'라는 뜻의 '38 따라지'들은 한국전
쟁 전까지는 한강 이북에 모여 살았다. 멀지않아 북쪽으로 돌아가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전쟁때 부산과 거제도로 옮겨간 실향민들도 다시
북상, 지금도 대다수가 수도권에 살고 있다.

피난민 84가구가 처음 모였던 남산 '해방촌'과아직도 평안도 사투
리가 많이 남은 서울 영락동(현 저동)은 유명하다. 이곳에 세운 교회가
신도 4만5천명를 거느린 영락교회다. 이북 5도와 경기-강원 북한지역
에서 태어나 월남한 실향민 1세대는 2세,3세를 낳아 가족을 늘렸지만, 정
작 당사자는 점점 줄고 있다. 해방후 휴전까지 8년간 월남자 수가 몇명
인지 정확한 자료는 없다.

6·25 이전엔 '4백만 실향민'이라는 말도 있었고, 이북도민회는 월
남자를 3백50만명으로 추산한다. 60년 인구조사 때 이북 출생자는 63만
7천6백90명으로 집계됐지만,이 숫자엔 경기-강원도 북한지역 출생자와 월
남후 사망자가 빠졌다.

당시 월남자 중에 고향을 숨겼던 사람이 많았다는 점에서도 실향민
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 숫자가 줄고 줄어 90년 센서스에서 집계
된 실향민 1세대는 41만7천6백32명. 황해도 출신이 33.5%(13만9천8백50명)
로 가장 많고, 평남 18.1%, 함남 16.0%, 평북 13.6%, 경기 10.5%다.

이들 실향민 중 43.8%가 서울에 몰려있고 11.3%가 인천, 20.1%가
경기도에 살고 있다. 75% 이상이 수도권에 집중돼있는 셈이다. 부산
6.9%, 강원 5.0%가 웬만큼 뚜렷하고, 나머지는 비슷비슷하다.

부산은 피난시절 눌러앉은 사람이 많고, 강원도는 북한과 가깝다는
점에서 '제2의 고향' 우선순위에 올랐으리라는 분석이다. 2,3세를 포함
한 '실향민 총수'는 알 수 없다. 이들은 남한 출생자로 분류되기 때문이
다. 이북도민회가 파악한 바로는 실향민 수가 7백만명을 넘는다한다. 3백
50만명쯤 월남했다는 전제에서 나온 숫자다.

북한땅에 발 한번 디뎌본 적 없는 2세들도 '실향민 의식'이 높다는
게 놀랍다.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 부설 동화연구소가 95년 2세들에게
"고향을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느냐"고 질문했더니 46.4%가 "태어난 곳은
남한이지만 부모 고향은 이북 어디라고 한다"고 답했고, 42.8%는 "부모
고향인 이북 지명을 말한다"고 했다. 89.2%가 북한을 고향으로 생각하
는 셈이다.

49년 남대문시장 건너편에 문을 열었던 이북5도청은 전쟁때 부산으
로 피난한 것을 포함, 무려 13번이나 옮겨다니는 '셋방살이'끝에 90년대
들어 서울 구기동 북한산 자락에 둥지를 틀었다.

실향민 1세와 후손을 '도민'으로 규정한 이북5도청은 도지사 5명은
물론, 명예시장-군수 96명, 읍-면장 7백99명을 거느린 조직이다. 반공
궐기대회와 강연회, 도민회 지원, 북한관련 연구업무를 주로한다. 본적
확인같은 민원업무도 본다. 89년 설립된 동화은행도 1백17여만 실향민
후원으로 이룬 결실이다. < 한현우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