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심천 서쪽 운천동 산직말에서 태어났다.

무심천 둑을 건너자마자 논이 있고 논 끝에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 동네가 산직말
이다. 무심천 서쪽에서 태어나 무심천 동쪽에서 학교를 다니며 자랐다.
어릴때는 시 쓰는 일보다 그림에 더 소질이 있었던 지라 무심천 바로 밑
에있는 중학교를 다니던 무렵 무심천 둑에 앉아 그림을 그리곤했다.
지독하게 가난해서인지 절망이 깊어서인지 책읽고 글쓰는 일에 빠져 버린
대학시절 무심천가를 오가며 많이 몸부림쳤고 많이 울었고 많이헤매었다.

그땐 집이 무심천 옆 내덕동 새마을이란 빈민촌에 있었고 동료 선
후배들이 방아다리 근처에 많이 살고 있어서 밤이면 무심천 바로 옆에 있
는 단골술집으로 모여들었다. 거기서 도스토예프스키와 카프카와 사
르트르를 이야기하며 끝간데없는 문학논쟁과 철학논쟁으로 목청을 높였다.
술집문이 닫힌 뒤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고 무심천 둑으로 장소를 옮겨
안주없는 깡소주를 더 마셔 누군가 쓰러져야 일어서곤 하였다.

그때는 모두들 실존주의 철학과 문학에 깊이 빠져있었다. 그러나
실존주의자이기 이전에 대부분 로맨티스트들이었다.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노래가 끝난 뒤의 고요가 무서워 시를읊고 시가 끝난 뒤의 침묵때
문에 다시 술을 마시며 모두들 문학과 사생결단이라도 할 듯한 모습들이
었다.

그 무심천 가에서 우리끼리 문학을 했고 연애를 했고 기다림을 배
웠다. 그중에 우리를 늘 주눅들게 만들던 선배 한 사람때문에 그와 대
거리를 해보려고,그를 어떻게든 넘어서보려고 책을 참 많이 읽었다. 대학
시절 내내 쉬지않고 책을 읽었다. 읽어야할 책들을 도표를 그려가며
지워나갔다. 그 어둡고 힘들던 이십대의 문학청년기. 나는 혼자 무심천
하류 까치내까지 걸어갔다 오곤 했다. 저녁노을이 감빛에서 살구빛으
로 변하다 마침내 어둠속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둑위에 앉아있는 날도 많
았다. 강아지풀 속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개구리들조차 사람을 무서워
하지 않고 올라앉아 함께 놀기도했다. 물가에 바람이 불고 억새풀이
흔들리고 그 위로 구름이 모습을 수 없이 바꾸어가는 동안 고흐와 이중섭
과 마야코프스키와 치열하게 살다간 예술가들을 생각했다.

내 시에 억센 파도와 울창한 숲과 화려하게 아름다운 풍경보다는
저녁강물과 억새풀과 쓸쓸한 풍경이 자주 등장하게 되는 것도 어쩌면 그
때 문학청년기에 내가 빠져들곤 하던 무심천 가의 그런 저녁풍경 때문인
지도 모른다.

최근 십년 이상 매달려 있던 일들을 잠시 놓고 미움도 욕심도 잠시
내려놓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심천 하류를 걸어가 본다.
지금은썩고 병든 무심천, 당장 편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기심으로상처투
성이가 된 채 도심 한가운데를 흘러가는 무심천.

내 미숙하기 그지없던 젊은 날과 그날의 실수와 절망과 새로운 날
에 대한 갈망과 몸부림과 상처를 다 받아주던 무심천을 걸으며 물의 이름
이 왜 무심천일까. 왜 그많은 이름 중에 무심이란 이름을 붙였을까를
생각해본다.

"한세상 사는 동안/가장 버리기 힘든 것 중의 하나가/욕심이라서/
집착이라서/그 끈 떨쳐버릴 수 없어 괴로울 때/이 물의 끝까지 함께 따라
가 보시게/흐르고 흘러 물의 끝에서/문득 노을이 앞을 막아서는 저물무렵
/그토록 괴로워하던 것의 실체를 꺼내/물 한자락에 씻어 헹구어볼 수 있
다면/…달맞이꽃속에 서서 흔들리다 돌아보시게/돌아서는 텅빈 가슴으로/
바람 한줄기 서늘히 다가와 몸을 감거든/어찌하여 이 물이 그토록 오랜
세월/무심히 흘러오고 흘러갔는지 알게 될지니/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니/다 비워 고요히 깊어지는 마음을 무심이라 하나
니" ----졸시 '무심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