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이여인의 추억 ##.
서울 마장동에서 정육점을 꾸려가던 이할머니(당시 62세)는 박정
희의 죽음을 친구가 걸어온 전화를 받고 알았다. 큰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밥도 한 그릇 더 먹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
구는 "너 참 독하구나"라고 말했다. 그 8년 뒤 할머니는 한 기자에
게 이런 후회를 말했다.
못했던 박정희는 결혼식주례를 서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이광로 소령의
결혼식. 1960년 11월20일 박소장이 육본작전참모부장이었던 시절에 공수단
장교로 있던 李의 끈질긴 간청을 받아들여 처음이자 마지막 주례를 섰다.
이광로는 1970년대에는 청와대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일했고 군단장을 거쳐
지금은 황해도 지사로 있다.
"옷 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때는 내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야. 표현을 안하더라도 명복을 빌어주었어야 했는데. 곱게 돌아가시
지 못한 게 마음 아파요.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요. 옛날 추억이 생
각났더라면 이렇게 살지 않았지요. 미안하다는 생각뿐이지요. 지금
은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던 그 사람이 극락세계에 갔으면 하고
생각하지요.".
이할머니는 1948년부터 1950년 2월초순까지 박정희와 약혼한 뒤
동거했던 여자이다. 그녀는 1993년 4월에 죽었다. 기자는 1987년에
이여인의 존재를 알아내어 기사로 썼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여인
에 대한 많은 취재와 추측과 과장, 그리고 소설이 잇따라 나왔다.박
정희와 이여인(가족들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익명으로 한다) 두
사람 모두 세상을 떠난 지금 이 관계에 대한 유일한 직접적 증언은
1987년 이여인의 술회를 자유기고가 강인옥이 녹취한 것이다. 박정
희의 죽음을 실마리로 하여 추억을 더듬어가는 이여인의 회고담 가
운데서 일부만 뽑아본다.
1947년말 이여인은 박경원 장교의 결혼식에서 박정희를 만났다.
그녀는 동향인 박경원의 아내 들러리로 나왔고 박정희는 신랑측 들
러리였다.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도 없고, 일본 육사를 나왔다는데 박
력이나 기품은 있었어요.".
박정희보다 나이가 여덟 살 어린 그녀(22세)는 그때 이화여대 아
동교육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함경도에서 단신으로 월남하여 공부하
자니 돈이 모자랐다. 박정희가 학비를 보태주었다. "(박정희가) 만
나자고 하면 만나고 데리고 나가서 식사도 사주고"하다가 약혼을 하
게 되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녀의 이화여대 성적표를 확인해보았더
니 1947년도 2학기에는 결석일수가 많아 학점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
다. 동거 이후에는 대학은 중퇴상태가 되었다. 학적부에는 박정희가
보증인으로 되어 있고 '학생과의 관계'란에는 '숙형'이라 적혀 있다.
"미스터 박은 태릉 육사의 중대장이었는데 약혼식은 성대하게
거행했지요. 용산관사에 가서 합친 지 얼마 안 있다가 숙군대상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연락해 주었어요. 이효 대위가 술에 취해 왔
어요. 내손을 꼭 잡고 내가 어리고 수줍어 하니 돈을 얼마 주었지요.
이북서 공산당이 싫어서 내려왔는데 빨갱이 마누라라니….".
이효대위는 박정희와 육사2기 동기생이었다. 육군경리감 병참감을
거쳐 소장으로 예편하였고 1992년에 작고했다. 이대위는 그때 박정희
의 관사와 가까운 집에 살고 있었다. 박정희가 군내의 남로당 수사에
걸려 구속된 것은 1948년 11월. 그 며칠 뒤에 숙군수사의 실무장교이
던 김창룡(뒤에 특무대장으로 있다가 암살됨)이 이여인을 찾아왔다.
"김창룡이 경위를 설명해주고는 미스터 박이 메모를 주라고 하더
라면서 건네줍디다. 내용이 이랬어요.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다. 이
것 하나만 믿어주었으면 한다. 육사 7기생 졸업식에 가려고 면도도
하고 아침에 국방부에 출근하니 어떤 사람이 귀띔해주더라. 내가 얼
마든지 차 타고 도피할 수가 있었는데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여인 때문에 도망을 안갔다니. 그러나 난 괘씸했어요. 그것까진
또 괜찮아. (박정희의 친척들이) 재옥이 엄마(박정희의 본처 김호남)
가 알까봐 서대문 형무소에도 면회를 못다니게 해요. 그 이는 이혼수
속도 안하고 있었어요. 재옥이 엄마가 행방이 묘연해서 나 몰래 이혼
수속을 못했던 것이지요. 여자가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애까지 내게
입적한다는데 천길 만길 뛰겠더라고. 난 배신감으로 용서가 안되었어
요. 미스터 박은 나한테 무척 잘했어요. 그때는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잘해주었어요. 그게 고마웠지만 괘씸한 생각도
들고 해서 가출을 여러 번 했어요. 그때마다 잡혀오고.".
이여인은 갸름한 얼굴의 미인으로서 성격이 아주 섬세하고 신경이
날카로운 여자였다. 박정희가 잘해준 것만큼 그에게 끌리지는 않았다
고 하니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은 독해요. 그 뒤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보면
독해. 일본 교육을 받은 탓인지. 그러나 다감한 분이었습니다. 이왕
남이 될 바에야 내가 너무 거만 떨었고 쌀쌀했어요. 대통령이 될 줄
알았으면 덜 쌀쌀했을 걸. 더는 몰라도 국방장관이 될 자격은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아무리 애써도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 거예요.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기에 지금 이렇게 사는지도 몰라.한
마디로 내가 쌀쌀 맞았어요. 연분이 아니었지.".
이여인은 "햇수로는 3년이지만 8개월만 같이 살았다"고 했다. 그
녀는 가출을 되풀이 했고 그때마다 박정희는 사방을 헤매고 다니면서
잡아왔다는 것이다.
"1950년2월6일에 (집 나간다는) 메모를 밤에 써놓고… 미스터 박
은 홀에서 공부한답시고 페치카에 불을 때고… 관사는 하이클라스였
어요.의자로 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잠잘 때인데 몰래 나왔어요. 편
지에는 '그동안 고마웠다. 마음이 돌아서질 않으니 날 찾지말라. 날
찾으면 투신자살할 것이다'라고 썼어요. 미스터 박은 술먹고 자고 있
었고 내 몸 하나 빠져 나왔어요. 남자가 부화가 나서 어디 살겠어?
시장서 고향 아줌마를 만나 '지금 남자는 결혼경력이 있고 거기다가
빨갱이니'하고 푸념을 했습니다. 그 아줌마는 '그냥 살지 여자가…'
라고 했어요. 그래도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영리하긴 해서 요리조리
피해다녔어요. 가출후 전화했어요. 비신사적으로 행동하지말라고. 가
출한지 한 20일 뒤에 내가 교만하다느니 못됐다느니 했다는 소문이
들렸어요. 내 성질이 어떤데. 고향 부인네 집에서 살았는데 사변만
안났어도 내 인생이 바뀌는 건데….".
이여인은 박정희와의 사이에서는 소생이 없었다고 했다. 6·25사
변이 터진 뒤에 이여인은 재혼했고 월남한 가족들과도 재회했다. 그
녀는 대구에서 우연히 박정희와 스치게 된다.
"피란시절 대구에서 그이가 지프를 타고 오는 걸 본 적이 있어요.
내가 임신 2개월 되었을 때인데 내가 모양내고 원피스 싹 빼고 가는
데 지프차가 빵빵 대는 소리가 들려요. 사변통에 월북했으리라 생각
했었는데 돌아다보고깜짝 놀랐어요. 박씨가 내리려고 해서 나 살려라
하고 뛰었지요. 마침 트럭이 지나가서 만나지 못했어요.".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여인을 못잊어 했다. 이여인의 남
동생을 불러 안부를 묻기도 했고 도움도 주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어쩌면 그런지.
그냥 대통령이지. 그게 괴로웠으면… 내가 쪼글쪼글 늙었을 거야.".
이여인은 박정희에게 큰 실연 안겨다 주었다. 속이 깊고 다감한
박정희는 이 실연을 오랫동안 간직한 채 아마도 무덤까지 가져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