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년, 학교에 가다 ##.

다시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26일에 쓴 '나의 소년 시절'을 인
용해본다. 맞춤법을 요사이 식으로 고치고 한자를 한글로 바꾸었을 뿐
원문 그대로 싣는다.


사진설명 :
언론인 출신이었던 청와대 공보비서관 김종신이 '박정희 대통령-농민의
아들이 대통령이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겠다며 박대통령에게
미주알 고주알 캐묻자 박대통령이 직접 써준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
그 첫 장.

[상모동이란 마을은 1910년대의 우리나라 농촌을 그대로 상징하는
가난한 마을이었다. 이 마을에는 선산 김씨 수호가 그래도 부유한 편
이었고 기타는 거의가 한량없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90여호가 6개 소부
락군으로 나뉘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상모동에 와서는 약 1천
6백평 정도의 외가 위토를 소작하면서 근근이 양식은 유지가 되고 형
들이 성장하여 농사를 도우게 되니 생활은 약간씩 나아졌다. 아버지는
거의 가사에 무관심하고 출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집안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어머니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어려
서 양가의 규수로 태어나서 출가전까지는 고생이라고는 별로 모르고
자랐으나 출가후는 계속된 고생속에서도 우리 7형제를 남못지 않게 키
우시느라고 모든 것을 바치셨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어머니는 셋째 형 상희씨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켜 공부를 시키셨다. 그 당시 이 마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는
학생은 상희형 하나뿐이었다. 내 나이 9세가 되던 해 아버지와 어머니
는 나를 구미보통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형은 벌써 졸업을 했다. 이
때 우리 동리에서는 (세 아이가) 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다른 두아
이는 나보다도 나이가 몇살 위이고 입학 전에 교회에 다니면서 신학을
약간 공부한 실력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3학년에 입학을 하고 나는
1학년에 입학을 했다.

상모동에서 구미읍까지는 약 8km. 시골서는 20리 길이라고 불렀다.
(입학날은) 1926년 4월1일이라고 기억한다. 오전에 네 시간 수업을 했
으니까 학교수업 개시가 8시라고 기억한다. 20리 길을, 새벽에 일어나
서 8시까지 지각하지 않고 시간에 닿기는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시간
이 좀 늦다고 생각하면 구보로 20리 길을 거의 뛰어야 했다. 동리에
시계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시간을 알 도리가 없고 다만 가다
가 매일 도중에서 만나는 우편 배달부를 오늘은 여기서 만났으니 늦다,
빠르다 하고 짐작으로 판단한다.

또 하나는 경부선을 다니는 기차를 만나는 지점에 따라 시간의 빠
르고 늦다는 것을 짐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끔 기차 시간표가 변경
되면 엉뚱한 착오를 낼 때도 있다.

그러나 봄과 가을은 연도의 풍경을 구경하면서 상쾌한 마음으로 학
교에 다니는 것이 기쁘기만 하였다. 여름과 겨울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여름에 비가 오면 책가방을 허리에 동여매고 삿갓을 쓰고 간
다. 아랫도리 바지는 둥둥 걷어올려야 한다. 학교에 가면 책보의 책이
거의 비에 젖어 있다. 겨울에는 솜바지 저고리에 솜버선을 신고 두루
마기를 입고 목걸이와 귀걸이를 하고 눈만 빠꼼하게 내놓고 간다. 땅
바닥이 얼어서 빙판이 되면 열두 번도 더 넘어진다. 눈보라가 휘몰아
치면 앞을 볼 수가 없다. 시골 논두렁길은 눈이 많이 오고 눈보라가
치면 길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기도 한다. 사곡동 뒤 솔밭길은 나무가
우거지고 가끔 늑대가 나온다 해서 혼자는 다니지를 못했다. 어느 눈
보라가 치는 아침에 이곳을 지나다가 눈 위에서 늑대 두 마리가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고 겁을 집어먹고 마을 아이 셋이 집으로 되돌아오고
학교에 가지 못했다. 그 이후에도 그곳을 지날 때는 언제든지 늑대가
나오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눈이 똥그랗게 되어서 서로 아무 말도
않고 앞만 보고 빨리빨리 지나가곤 했다. 그런데 이 솔밭이 해방후에
고향에 돌아와 보니 나무 한 그루 없이 싹 벌목을 해서 뻘건 벌거숭이
산이 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수기를 읽어보면 시각적인 묘사가 아주 실감나게 전개되
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박정희의 즉석 연설에서도 가끔 그런 묘사가
있다.

예컨대 1963년 10월9일 부산에서 있었던 대통령선거 유세연설에서
그는 "맑고 푸른 가을하늘, 키 큰 코스모스, 코스모스보다 낮은 주막
집, 두 농부, 막걸리…"라고 가을풍경을 시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림
을 잘 그린 박정희는 사물의 핵심을 포착하는 능력이 있었다. 공사 현
장에서 그가 즉석에서 그려서 지시한 약도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간략
하면서도 본질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는 눈이 아주 좋
았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학교 다니는 나보다도 더 고생을 하는 분이 어머니다. 시계도 없
이 새벽 창살을 보시고 일어나서 새벽 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고 다음
에 나를 깨우신다. 겨울에 추울 때는 세숫대야에 더운 물을 방안에까
지 들고 와서 아직 잠도 덜 깬 나를 세수를 시켜주시고 밥을 먹여주신
다. 눈도 덜 떨어졌는데 밥이 먹힐 리 없다. 밥을 먹지 않는다고 어머
니한테서 꾸지람을 여러번 들었다. 아침 밥을 먹고 있으면 같은 동네
의 꼬마 친구들이 삽작곁에 와서 가자고 부른다. 어머니는 그 애들을
방안으로 불러들여 구둘목에 앉히고 손발을 녹이도록 권하신다. 밥을
먹고 채비를 차리고나면 셋이 같이 새벽길을 떠난다. 아직 이웃 집에
서는 사람들이 일어나지도 않은 새벽길을, 얼어붙은 시골길을 미끄러
지면서 뛰어간다.

망태고 밭두렁길을 뛰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청녕둑(집 앞에 있는
산이름) 소나무 사이에 우리들을 보내놓고 애처로워서 지켜보고 서 계
시는 어머니의 흰 옷 입은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학교에서 돌아오
는 시간이 늦어도 어머니께서는 늘 그 장소에 나와 계시거나 더 늦을
때는 동네 어귀 훨씬밖에까지 형님들과 같이 나오셔서 "정희 오느냐"
"정희야"하고 부르시면 "여기 가요"하고 대답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왜 좀 일찍 오지 이렇게 늦느냐" 하며 걱정을 하시면서 어머니는 자
기가 두르고 온 목걸이를 나에게 또 둘러주신다. 뛰어왔기 때문에 땀
이 나서 춥지도 않은데 어머니가 자꾸만 목에다 둘러주시는 것이 귀찮
게 여겨질 때도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구둘목 이불 밑에 나의 밥그릇
을 따뜻하게 넣어두었다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어머니는 상머리에 앉
아서 지켜보신다. 신고온 버선을 벗어보면 흙투성이다. 어머니는 밤에
버선을 빨아서 구둘목 이불 밑에 넣어서 말린다. 내일 아침에 또 신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얼었다가 저녁을 먹고 온돌방에 앉으면
갑자기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숙제를 하다가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
어버린다. 어머니가 억지로 나를 깨워서 소변을 보게 하고 옷을 벗겨
서 그대로 재우면 곤드레가 되어 떨어져 자버린다. 나의 나이 9세에서
15세까지 6년 동안을 이렇게 지냈다.]

정희 소년보다 네 살 위인 누나 재희는 학교에 다니지 않고서 동생
을 돌보는 입장이었다. 재희는 어머니로부터 한글을 배워서 읽고 쓰고
할줄은 알았다. 박재희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정희와 함께 학교에 다
니던 두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퇴해버렸다고 한다.

"부모가 학교에 가서, 선생들이 철봉 같은 체육 종목의 실기를 아
이들에게 시키는 것을 보고는 저러다가는 우리 아이들이 병신되겠다면
서 학교에 못다니게 하고 서당교육을 받게 했지요. 정희는 등교 때는
짚신을 하나 더 차고 갔지요. 돌아올 때 신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머니
와 내가 마중을 나가 기다리면 저 끝에 쬐끄마한 아이가 촐랑촐랑 걸
어오는 거예요. 하루 40리를 걷는다고 지쳐빠진 정희를 업고오면 등
뒤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정희는 몸이 약했어요. 새벽
밥이라 잘 먹지 못했고 겨울엔 도시락이 꽁꽁 얼어서 먹지 못하고 그
대로 가져오기도 했어요. 그래서인지 한때 밤눈이 어두웠어요. 밤만
되면 봉사 비슷하게 되어 변소에도 제대로 못갔지요. 제가 업어다 변
소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곤 했습니다. 소의 지레를 먹였더니 다시
눈이 밝아졌어요."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