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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의형제 김삼수목사 ##.
1979년 10월25일 오전8시경 청와대 출입문에는 63세 된 노인 한
사람이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야간열차로 올라와 대통령을 만나려
다 정문에서 제지당해 끝내 돌아서야 했던 길이었다. 이 노인은 소년
박정희와 함께 어린시절을 보내며 의형제를 맺었던 김삼수(당시 경북
금릉군 송천교회 목사·현재83세)였다. 김목사는 대구로 내려온 다음
날밤 두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과 비서실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앞에서 둘째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박정희와 결의형제를 맺은
김삼수. 구미 보통학교 제9회 졸업생으로 박정희보다 2년 앞선
1930년에 졸업했다. 키가 작고 몸도 약했던 김삼수는 '그래도 박정희보다
튼튼하고 큰 편이었다'고 회고한다. 상모리에서 박정희와 함께
통학했던 한해수는 앞에서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에 보인다.
10월27일 아침에 편지를 부치려던 김목사는 방송을 통해 대통령
의 서거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목놓아 울었다.
기자는 지난 1월7일 저녁에 대구에서 김 목사(현재 기독교 장로회
경북 노회 공로목사)를 만나 보았다. 김목사는 상모리에서 소년 박정
희와 함께 상모교회와 보통학교를 다녔던 친구였다.
"교회는 여름방학때마다 '하계학교'를 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동요, 동화, 율동, 설교, 성경 암송 등을 배웠어요. 그때 칠곡군이나
선산군에서 연합 경연대회를 열었습니다. 일본 경찰도 와서 참관했습
니다. 박정희는 노래나 동화구연을 아주 재치있게 잘했어요. 상모 교
회에서는 나와 정희 그리고 정규만 이렇게 셋이서 출전해 1등을 했지
요.".
박정희 소년은 다윗이 골리앗에게 돌을 던져 죽이는 구약의 장면
을 특히 좋아했다. 박정희가 보통학교 4학년 때였다.박정희는 자신의
사랑방에서 김삼수와 놀다가 의형제를 맺는 의식을 치른다.
"그때 결의형제라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먹물 먹인 실을 바늘에
달고 팔뚝에 약간 꿰면 평생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 되지요.우리는 서
로 오른팔에 문신을 새기고 팔을 걸고 맹세를 했지요.".
김목사가 걷어 붙인 오른 팔목에는 쌀알 크기의 푸른 문신이 남아
있었다. 김목사는 어린시절부터 박정희의 집에 자주 드나들며 박정희
의 셋째 형 박상희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랑방에 가면 박상희 형님이 우리들에게 그렇게 후덕하고 인자
하게 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늘 우리들에게 공부하는데 격려를 해 주
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 분이 우리들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해 주시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목사는 소년시절부터 박정희를 남들과 다른 친구로 기억하여 왔
다.
"저와 정희는 둘 다 체구가 작아 유난히 어른들로부터 걱정을 많
이 샀는데, 박정희는 나보다 더 작았어요. 둘이 팔씨름을 하면 비슷
했지요. 그런데 박정희는 지더라도 끝내 굴복한 적이 없습니다. 이길
때까지 계속하자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온갖 장난을 다 쳤지요. 그럴
때마다 정희는 매우기민하고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 다시 시작하는 겁
니다.".
박정희는 누구와 씨름을 하다 지게 되어 섭섭하고 분할 때면 새끼
손가락만을 편 오른 주먹을 쑥 내 보이며 상대방에게 흔들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내 새끼 손가락보다 못하다'는 뜻
이었습니다. 야망이 있는 아이였어요.앞산에 오르면 제게 이순신, 나
폴레옹, 링컨…그는 늘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
나 교과서에서 나오는 일본 영웅들을 숭배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너는 앞으로 군인이되면 위대하고 기개있는 장군이 되어 성공할거야'
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김삼수는 구미 공립보통학교를 9회로 졸업했고 박정희는 11회로
졸업했다. 김삼수는 와세다 중학과정을 통신강좌로 마친 뒤 과수원을
가꾸다 해방을 맞았다.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신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한국신학대학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에 들어 간
그가 박정희를 다시 만난 것은 1946년 여름 서울 남대문에서였다. 박
정희가 먼저 알아 보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어이, 친구. 여기 어찌 왔노."
"정희구나. 나는 여기 신학교에 왔네."
"그럼 힘써 하세!".
박정희가 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
왔던 때로 추정된다.
"우리 세대의 소망은 '힘써 하세'란 말 속에 다 들어 있었습니
다. 그는 언제나 '우리는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1961년 5월16일에는 김삼수가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가 되어 대
구 성락교회에서 봉직할 때였다.
"신문을 보니 군사혁명이란 글자 아래로 박정희란 이름이 나오는
게 아닙니까. 그때서야 박정희가 새끼손가락을 내밀던 모습이 떠 올
랐지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1963년 10월 그는 기쁨에 찬 편지를 통
해 이렇게 썼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하나님이 만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민족을 가난에서 해방시키고
폭압정치에서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도록 합시다.'.
그는 "설교같이 편지를 썼지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목사는 그
후 매년 한 두 차례씩 장문의 편지를 썼고 그때마다 박대통령은 답장
을 보내왔다. 박대통령의 감동적인 답장은 1965년 경에 있었다고 기
억했다.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도'라는 제목의 긴 글을 보내주었다는
것이다.
"너무 겸허하게 답장을 보내 주셨더군요. '친구의 충고를 정말 고
맙게 받는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에 이르는 길을 생각한 바대로 쓴 글
이었습니다.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런 지도자를 보내주셔서 감
사하다고 기도를 했지요.".
김목사는 그때부터 동료 목사나 교인들에게 '이런 대통령이 어디
있냐'며 자랑했다. 쿠데타를 했다고 친구를 비판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그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젊은 목사가 찾아와 박대통령을
비판하면 그는 "제대로 모르면서 그런 말 하는 법이 아니다. 네가 진
실로 목사가 되려거든 박대통령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되어보라"고 되
받았다.
1970년대 초까지 청와대에서는 조찬기도회를 매년 열었지만 김 목
사는 참석만 하고 대통령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피했다. 오직 필요할
때 장문의 편지로만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1978년 추석 무렵 김목사는 경북 금릉군의 송천교회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오랜만에 금오산을 오른다. 때마침 박정희 대통령이 가족
들과함께 이곳을 찾았다가 두 사람은 34년만의 해후를 했다. 그 순간
김목사는 '인의 장막' 속에 친구가 갇혀 있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이듬해 가을에는
부마사태가 터졌지요. 며칠을 기도하며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심하
고 10월25일에 청와대로 달려갔습니다만….".
그는 역사속으로 먼저 간 친구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로 박대통령이 조금 잘못한 것은 겸손하고 물러날 때를 잡
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민족에게 있
습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잘되면 질투를 하고 어떻게 되든 모함을 하
는 버릇입니다. 세번째는 인의 장막이지요.".
김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종을 우리 민족이 바로 받지 못하고 죄
를 지었습니다. 반성해야 합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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