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2학년이던 62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족들에게 힘든 얘기를 털
어놓았다. "저, KBS 탤런트 시험에 붙었어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집안
에 난리가 났다. 어머니와 언니들은 내게 대놓고 "미쳤다"고 했다. 단 한
분 아버지만은 내 편이셨다. "그래, 좋은 배우가 돼서 좋은 연기를 한다
면 다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좋아. 열심히 해봐라." 자유롭고 예술가
기질이 많으셨던 아버지 격려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김용택)는 우리나라 경제학박사 2호셨다. 미군정때는 재무부장
(현 재무장관격), 정부수립후에는 사회부차관을 지내셨다. 화려한 공직생
활에 비해 아버지는 돈과 거리가 멀었다. 84년 돌아가실 때 남긴 재산이
라곤 곧 철거될 6평짜리 단칸방 뿐. 아파트를 사드리겠다고 조르다 야단
만 맞았다. "대붕의 큰 뜻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냐"고 호통치시는 바람
에 눈치만 살펴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셨다. 중학교 가기 전까지도
나는 늘 부모님과 함께 잠자리를 했다. 딸 둘을 낳고 홀로 유학을 떠나
14년만에 돌아오신 뒤 얻은 셋째 딸이라서 '양념딸'이라는 별명도 붙여주
셨다.

한용운선생이나 워즈워스 시를 읊으며 설명도 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린 내가 뭘 안다고 그렇게 열심히 뜻풀이를 해주셨을까.
특히 '님의 침묵'을 읽어주시고는 '님'이란 꼭 남자를 이야기하는 게 아
니라 조국, 예술이 될 수도 있다고 한 말씀이 기억난다. 외국인 친구들이
집에 오시면 꼭 내게 '케세라세라'를 부르게 해 자랑하셨다.

결혼식날 내가 눈물을 보여도, 아버지는 활짝 웃으시며 친구들에게 "내
딸 예쁘지, 예쁘지"를 연발하셨다. 그때는 좋으셔서 그러나보다 생각했지
만, 막상 내가 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그렇게 예뻐
하던 딸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사
랑으로 웃음지으실 수 있었으리라. 좋은 책을 많이 읽고, 드라마 아닌 세
상에도 관심을 가져야 명배우가 된다는 아버지 말씀은 영원한 내 직업 철
학이 됐다. ' 탤런트 '.

● 약력
▲41년 서울생
▲경기여중-여고, 이화여대 생활미술과
▲62년 KBS 1기 탤런트로 방송데뷔
▲69년 MBC로 옮겨 `전원일기'`겨울안개'`사랑이 뭐기리래'`엄마의 바
다'`그대, 그리고 나'등 출연
▲83년 영화 `만추'로 마닐라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88년 연극 `19 그
리고 80'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
▲88년, 82년 MBC방송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