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선생님 ##.
박정희 교사에 대한 제자들과 주민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런 이
미지이다. 아침마다 나팔불고 청소에 철저한 사람, 운동과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잘 놀아주는 선생,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여서는 안된
다고 끊임없이 투지를 불어넣어주던 분,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제자
들을 사랑한 사람, 일본인들도 어려워한 대담한 배짱, 술을 좋아하는
교사, 가정방문을 많이 하고 학부형들과 잘 어울렸던 선생, 나팔· 스
파이크 달린 운동화· 목검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리고 교사로 만족할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 선생. 주영배(74·전 초등학교장)는 자신
이 3학년일 때 막 부임해와서 담임이 되었던 박정희를 이렇게 묘사했다
('이락선 비망록'에 있는증언록 발췌).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한 첫해(1937년도)에 촬영한 박정희와 교직원
일동. 뒷줄 왼쪽부터 박정희 선생, 김모 선생, 김현태(급사). 앞 줄
왼쪽부터 조익영 선생, 아리마 교장, 가토 히로시 선생, 스즈키 시치로
선생. 원내는 유모선생(위)과 정진행(직원).
'박정희 선생님은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청소시간에는 마스크를 하고 나와서 총채를 휘두르면서 학생들과
같이 청소를 했다. 깔끔한 성격의 그 분은 청소에는 매우 까다로웠다.
청소 당번이 가서 "청소 다했습니다"라고 보고하면 꼭 와서 확인을 하
는 것이었다. 꼼꼼히 살펴보고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두번 세번 "다시!"
하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박선생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의 청소상태
를 반드시 검사하였다.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거나 유리창을 닦는 청소를 할 때는 키가 작은
어린이들이 할 수 없으므로 박선생이 직접 해주기도 했다. 방과후에는
어김없이 운동장에 나가 철봉체조를 하고 달리기를 했다. 학생들과 함께
씨름도 했으며 아이들을 울러메고 안아주고 했다. 박선생은 5학년에게는
조선어를 가르쳤다. 한글을 배워야 민족혼을 이어갈 수 있다고 암시했다.
나는 5학년 상급생들이 "박선생은 사상가야"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상급생들이 "왜 우리나라가 망했지" "우리나라의 국기는 어떻게
생겼나"라고 소근대는 것을 듣고는 박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박선생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은 분이었다. 모든 학급원을
똑같이 대우해주시면서 개성을 살려주셨다'.
주영배는 박정희가 자신의 집을 찾아준 일을 평생 잊지 못하겠다고 썼
다.
'가정실습지도시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저희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부모님에게 여쭈었더니 "이렇게 먼 곳까
지 오시겠니"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정말 오셨습니다.농
촌이라 별다른 접대는 없었지만 만족하시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모습
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싶도록 감사했어요'.
제자 전경준은 "선생님은 열등아나 사고아 등의 가정을 자주 방문했다"
고 기억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월급을 떼내어
도와주었다고도 한다. 박선생은 또 학교에서 가까운 제자 함성백의 집에
종종 찾아와서는 그의 형과 농업진흥에 대하여 의논하기도 했다. 학교에
선 농번기인 봄 가을에 학생들에게 4∼5일씩의 휴가를 주어 농사와 가사
를 돕도록 했다. 이 기간에 박정희는 학급원들의 가정을 찾아가서 농업
과 가사 실태를 조사하였다. 제자 김경운은 자기 집을 찾아온 박선생이
보리밥과 살구를 맛있게 먹고 가던 기억을 오래 간직했다.
박정희가 문경공립보통학교에 부임하였을 때 조선총독부는 전임 우가
키총독의 시책을 이어받아 농촌진흥정책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 정책의
하나로 문경공립보통학교는 문경갱생농원(문경면 하리)과 신북갱생농원
(신북면 갈평리)을 경영하는 지정학교가 되어 있었다. 전국적으로 시행
되고 있던 이런 지정학교제도는 교사들이 농촌부락의 지도를 맡고 학교
는 농촌개발운동을 이끌어갈 부락의 중견인물들을 양성한다는 목적을 갖
고 있었다. 1937년 현재 경북에는 이런 지정학교가 31개교, 장래에는
1백80개교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문경보통학교가 경영주체로 되어 있었던 이 두 농원의 원장은 아리마
교장, 원감1명, 지도원1명, 강사 약간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 농원에서
는 농촌개혁의 지도자감인 젊은 이들을 합숙시켜 9개월 과정의 교육을
시켰다. 농장에서 농사도 짓고 강의도 들었다. 근로체험에 의한 농민정
신의 도야와 자치자영의 농민정신 함양, 그리고 황국농민으로서의 자각
이 교육목표였다. 농촌진흥정책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하여 '농촌진흥가'
란 노래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박정희 교사도 이 농원에 나가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일본 히로
시마대학교 교수인 최길성이 현장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박정희는 문경
보통학교 부설 신북간이학교에 대리출강을 40일 정도 한 적이 있다고 한
다. 2년제 보통학교인 이 신북간이학교에는 강광을선생 한 사람이 근무
하고 있었는데 이 분이 40일간 출장을 한 사이 박정희가 대리강의를 하
면서 신북농장에도 나가서 지도를 했다는 것이다. 지금 문경에는 그때
박정희로부터 지도를 받았던 농민들중 김성환등 세 사람이 살아있다.
최길성 교수는 박정희의 농촌진흥정책 현장체험이 1970년대에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많은 발상을 제공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교수는 새마을 운동과 농촌진흥정책의 유사성을 비교하는 표도 만들었
다.
운동의 이념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이 '자조, 자립, 협동, 충효애
국'이고 그것의 집약적 표현이 국민교육헌장이었던 데 대해서 우가키 총
독의 농촌진흥은 '자립, 근검, 협동공영, 충군애국'과 교육칙어였다.
박정희, 우가키 두 사람 다 농촌출신 군인이었다. 두 운동의 현장지도
자들은 새마을 연수원과 농도강습소에 의하여 각각 양성되었다. 새마을
노래와 농촌진흥가, 경제개발5개년 계획과 농가경제5개년 계획, 육림일
과 애림일, 모범부락의 선정 등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런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우가키의 농촌진흥정책은 식민지지배의 질곡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은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를 위한 물질적 토대를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
다.
제자 이영태는 박정희 선생이 조선어 시간에 태극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고 증언했다. 박정희는 복도를 향해서 입초를 배치한 뒤 우리나라
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대구사범 때 김영기선생이 쓰던 방법이
었다. 박선생은 또 음악시간엔 황성옛터와 심청이의 노래를 가르쳐 주었
다. 이영태는 박선생을 통해서 임시정부가 상해에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영태는 박선생이 경찰지서의 사찰주임인 오가와 순사부장 하고 자주
논쟁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박준복의 증언에 따르면 박선생은 일본인
교사들 하고도 사이가 좋았는데 아리마 교장과 야나자와교사와는 말다툼
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야나자와가 "조선인의 주제에…"라
고 말하자 박정희가 의자를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가 담임
했던 5학년의 급장이었던 신현균(신현균)은 박선생이 특히 우리 말의 지
도에 열성을 보였다고 기억했다. 박선생은 운동회 때 1백m 달리기에서
일본인 교사 쓰루다에게 졌는데 연습을 많이 하여 다음 시합에서는 그를
물리쳐 문경에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박정희는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
하는 성격이었는데 특히 일본인한테 더욱 그러하였다. 박선생은 제자들
을 모아서 나팔조를 만들고 지도했다. 신현균은 1962년에 '지금도 아침
6시 서울제일방송에서 기상나팔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생님 생각이 간절
합니다'라고 썼다.
박선생은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 보
고 나팔을 불었다. 마을사람들은 "야, 박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
여물을 끓여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잠든 민족을 깨워일으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