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만주행 ##.

박정희 선생이 혈서를 써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시험을 칠 수 있

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동료 교사 유증선의 증언은 지금까지의 통설과

상반된다. 통설은 박정희가 교장과 싸우고 교사직을 그만둔뒤 만주로

갔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은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많이 유포

되었다. 이 통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박정희가 '독립운동을 할 힘

을 기르기 위해서 만군 장교가 되려고 했다'는 신화로 발전하기도 했

다.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종합할 때 혈서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

인다. 박정희는 대구사범 재학 때나 문경교사 시절에 늘 군인이 되겠

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교장과의 불화 때문에 충동적으로 군인

의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집념의 실천이었다. 1962년에 당시

최고회의 의장 비서였던 이낙선 중령이 정리해둔 비망록에서도 비슷

한 대목이 발견된다.


사진설명 :
1940년도 졸업앨범 사진에 나오는 박정희(한가운데)는 다른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빡빡 깎았다. 일제는 전시생활 자세를 강조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이런 머리 깎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장발이었기
때문에 일인 교장의 지적을 받고 싸움을 했다는 통설은 검증을 요한다.

'원래 일본 육사는 연령초과였고 만주군관학교도 연령초과였으나
군인이 되고자 하는 일념에서 군관학교에 편지를 하였다. 그 편지가
만주신문에 났다(이렇게 군관을 지원하는 애국 정신이 있다고…). 이
신문을 보고서 강 대위가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었고 그와의 상면은
만주의 여관에서였다. 그로부터 강은 박의 인도인이 되었고, 강은 당
시 시험관이었다. 강 울산인'.

이낙선 중령이 당시 취재한 내용도 유증선의 증언과 거의 일치하
고 있다.

그러면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던가. 대구사범 동기생으로서 그때
문경과 가까운 상주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권상하(전 대통령 정
보비서관)의 증언.

'1939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박정희가 보따리를 싸들고 나를 찾아
왔다. 머리를 길렀다고 질책하는 시학(장학사) 및 교장과 싸운 뒤 사
표를 던지고 나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만주로 가서 대구사범
교련주임 시절에 자신을 총애해 주었던 아리카와 대좌를 만날 예정이
라고 했다.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열차편으로 떠나는 정희를 전
송했다.'.

박정희는 권상하 이외에도 몇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만주군관학교 입학시
험을 치르고 학교로 돌아와서 계속해서 근무하다가 다음해 3월에 만
주로 떠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박정희가 아리마 교장을 패주었다
느니 술상을 뒤엎었다느니 싸우고 갔다느니 하는 말들은 뒷받침되지
않고있다. 더욱 이상한 것은 1976년 2월17일 대통령 공보비서관 선우
연이 작성하여 박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둔 '대통령 이력서'의 내용
이다. 이 자료는 박대통령이 읽고서 교정을 본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자료는 박정희가 만주로 떠난 동기에 대해서 '도 장학사가 나이가 많
은 아리마교장에게 불손한 태도를 취하는것을 보고 혐오를 느낀 것이
교사직 사임의 하나이다'고 했다. 아리마 교장이 여기서는 동정의 대
상으로 둔갑하고 있다. 박정희는 그러면 왜 이런 신화가 만들어질 소
지가 있는 말을 했을까. 혹시 자신의 만주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
스로 꾸며낸 말이 아닐까. 박정희보다 네 살 위인 누님 박재희는 생
전에 이런 증언을 남겼다.

"동생이 가끔 내 집에 와서는 '죽어도 선생질 더 못해 먹겠다'고
말하곤 했어요. 어느날 밤늦게 동생이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만주군
관학교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님과 상희 형에게 교
사를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가 호통만 들었다면서 만주로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에 돈을 받아서는 본가에
들르지도 않고서 만주로 갔지요.".

박정희의 둘째 형 박무희의 장남 재석에 따르면 박상희는 동생이
안정되고 대우받는 교사직을 팽개치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려고 하
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러 번 경찰서와 감옥에
끌려간 적이 있는 항일투사 박상희는 동생의 변절을 허용하기가 힘들
었을것이다. 박정희는 이러한 비난에 대한 일종의 변명거리로서 일인
교장 및 시학과의 충돌설을 꾸며내거나 과장하여 퍼뜨린 것이 아닐까.

모든 신화에는 작은 근거가 있듯이 박정희의 신화도 작은 사실에서
출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박정희가 만주로 시험을 치러 간 시기에 어
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제자 황실광(76)은 박선생 보
다는 다섯살 아래로서 졸업한뒤에도 박선생한테 자주 놀러갔다. 1939
년 10월 어느날 하숙집에 갔더니 그는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너하고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다. 나쁜 놈 같으니
센진이 뭐야, 센진이. 그래놓고도 지서장을 불러와 화해를 하라니.내
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것으로는 화해못한다.".

박선생이 전해준 사연은 아리마 교장이 시학을 접대하는 술자리에
서 조선인을 모욕하는 발언을했고 자신이 크게 반발했는데 이런 논리
였다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정신은 조선인과 일본인이 하나가 되어 미영귀축을
몰아내자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당신들은 조선인을 차별함으로써 천
황의 뜻을 어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황을 들고나와서 교장을 몰아세우자 아리마가 당황하여 일본경
찰을 중간에 넣어 화해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의 충돌이 우연의
일치로 만주군관학교 시험시기와 비슷한 때에 발생했기 때문에 '항일
의식이 강렬한 박선생이 악질 일본인 교장과 싸우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만주로 갔다'는 과장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정작 박대
통령은 자신에 대한 소년용 전기를 준비하고 있던 김종신 공보비서관
이 "각하는 왜 만주에 가셨습니까"라고 묻자 단순명쾌하게 이야기했
다.

"긴 칼 차고싶어서 갔지".

사소한 사연은 어쨌든 이 말이 박정희의 만주행 미스터리에 대한
가장 정직한 해답일 것이다. 박정희는 1939년 10월 만주 목단강성에
있는 만군 관구사령부내 장교구락부에서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2기
시험을 치렀다. 시험과목은 수학,일본어,작문,신체검사 등이었다. 이
재기(작고·육군대령예편)도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재기는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만주군 대위가 국민복을 입은 청년을 데리고
들어오길래 시험감독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청년이 수험생 자리
에 앉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까 대위는 간도특설대에 근무하
던 강재호였고 수험생은 박정희였다. 다음해 1월4일자 만주국 공보에
'육군군관학교 제2기예과생도 채용고시합격자공보'가 실렸다. 박정희
는 240명 합격자(조선인이 11명 포함된 만주계) 가운데 15등, 이한림
(전 1군사령관)은 봉천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20등이었다.

박선생을 쫄쫄 따라다니던 5학년생 강신분 어유남 서광옥은 박선
생이 만주로 떠난다는 소식을듣고 하숙집을 찾아갔다. 울면서 매달리
는 이들에게 박선생은 "우리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
다"면서 선물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더라는 것이다. 박정희가 문경을
떠날 때는 많은 유지들과 학부모,학생들이 버스정류장에 나와서 전송
했다.

박정희는 고향에 들렀다가 3월 하순에 구미역 북행선 플랫폼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다. 칠순 나이의 백남의는 박정희의 옷자락을 붙들면
서 "늙은 어미를 두고 왜 그 먼 곳에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 노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뒤로 하고 박정희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가 뒤
돌아보니 그의 어머니는 흰옷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들어
흔들고 있었다.

(조갑제 출판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