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토벌사령부 작전장교 ##.

1948년 10월19일 밤 8시쯤 비상나팔을 신호로 하여 여수 주둔 14연대
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연대는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에 출동하기 위하
여 대기중이었다. 연대내의 남로당 조직책인 지창수상사가 주동이 된 이
날 밤의 반란으로 20여명의 장교들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14연대가 여
수를 점령하자 순천에 파견되어 있던 2개 중대도 호응하여 순천을 점령
했다. 이 반란으로 여수에서 군인들과 공무원 1천2백명이 피살되었다.순
천에서도 4백여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육군본부는 21일자로 광주
5여단 사령부내에 반군토벌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에 송호성준장을 임
명하여 2여단(여단장 원용덕대령)과 5여단(김백일대령)을 지휘하도록 했
다. 22일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며칠 뒤 토벌군사령
관이 원용덕으로 교체되었다. 참모장은 당시 육군 정보국장 백선섭, 작
전 및 정보참모는 정보국 첩보과장 겸 전투정보과장 김점곤소령이었다.
김소령은 내근 데스크 일을 맡고 있었다. 사령관과 참모장이 일선 전투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지시를 하면 이를 받아 처리하는 일이었다. 예하부
대에 작전명령 하달, 보급 관리, 경찰과의 연락 등이 주임무였다. 김점
곤은 유양수소위에겐 경찰과의 연락업무를 맡겼다. 김소령은 전투정보과
이기건소위도 불러 내렸다. 김점곤은 작전참모 업무를 보좌할 사람을 찾
다가 과거의 부하였던 박정희 소령이 생각났다. 그는 사관학교의 중대장
요원으로 있던 박소령을 토벌사령부 근무로 발령내도록 원용덕 사령관에
게 건의했다. 원대령도 8연대장 시절에 박정희를 데리고 있었고 그의 탁
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쾌히 승낙했다. '좌익장교' 박정희 소
령은 좌익 토벌군 사령부의 작전장교로 일하게 된 것이다. 김점곤의 증
언--.


사진설명 :
한 경찰관 부인이 좌익반란군에 의하여 학살된 사람들 사이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고 있다.

"전사기록에는 박정희가 작전참모로 적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나
를 보좌하여 상황판 정리, 작전관계 보고서 작성 따위의 일을 했다. 아
주 능숙하게 일을 했고 이상한 낌새는 느낄 수 없었다. 따라서 항간에서
이야기하듯 반란군에 유리하게 부대배치를 했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
다.".

광주토벌사령부에 내려온 짐 하우스만 대위는 미군사고문단장의 특사
자격이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미국사람을 싫어하는 인물'이란 정보가
있어 그는 통역을 중간에 넣어 대화를 걸어보았다. 박정희는 영어를 상
당히 이해하는 것 같았으나 영어로 말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정희는 이
때 속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을 것이다. 이미 시동이 걸린 숙군수사
가 자신에게까지 다가오지 않을까 불안에 휩싸여 있었겠지만 누구한테도
의논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박정희를 더욱 불안하고 곤혹스럽게 만
드는 사건이 생겼다. 박정희와 함께 남로당에 입당하고 있었던 '군내의
좌익거물' 최남근 15연대장이 토벌사령부로 연행되어 온 것이다. 15연대
는 마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여수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남근은 하
동방면으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월21일 그는 1개 대대를 이끌
고 지리산에 도착했다. 이때 반란군의 기습을 받았다. 최 연대장은 조
시형(농림부장관 역임)소위와 함께 반군에 붙들렸다가 엿새뒤에 하동군
화개장터에 나타났다. 최남근은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란군 두목 김지회부대와 부딪쳤을 때 그를 죽일 수도 있었는데 같
은 말씨이고, 같은 함경도고 해서 인간적인 양심상 죽이지 못하였다. 그
래서 내가 손을 들고 합류하였다. 비록 좌익사상을 가졌지만 어제의 전
우들이 골육상잔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또한 나를 아껴준 상관
이나 부하들을 배신할 수가 없어서 탈출하였다. 김지회의 처가 묵인하여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군당국에서는 최남근이 반군에 붙잡힌 상황부터가 의심스러운 점이 많
다고 판단하여 광주 토벌군사령부에 일단 연금시켰다. 여기서 그를 신문
한것은 김점곤 소령이었다. 김 소령은 8연대 중대장으로 있을 때 원용덕
의 후임으로 온 최남근 연대장을 모셨던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미군방
첩대는 최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는 초급장교 시절에 가족을 데리고 온
다면서 두 달 동안이나 부대를 이탈하여 북한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점곤은 최남근의 계급장을 스스로 떼게 했다. 잠은 장교숙소에
서 재웠다. 김점곤 소령은 이기건 소위를 부르더니 "오늘 밤 최남근과
박정희가 서로 할 말이 많을 것이니 주의하라"고 당부하였다(이기건 증
언). 과연 그날 밤 최남근과 박정희는 밤새도록 소곤소곤하더란 것이다.

김점곤 소령은 최남근에게 자술서를 쓰도록 했다. 읽어보니 다른 목
격자들의 증언과 맞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제수사를 할 수도 없었다. 김
소령은 자신의 소견서를 봉투에 넣어 최남근과 함께 숙군 수사본부가 된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송치했다. 육본에서는 11월8일자로 최남근을 4여단
참모장으로 전보발령했다. 그 직후 서울로 철수한 김점곤 소령은 인사차
백선엽정보국장을 찾아갔다. 마침 그때 미군 방첩대 장교가 들어오더니
최남근에 관련한 자료를 내놓는 것이었다. 백국장은 서랍속에 넣어두었
던 김점곤의 소견서를 꺼내 대조하더니 안색이 변하는 것이었다. 즉시
최남근을 체포하라고 4연대로 전보를 쳤다. 최는 부임하지 않고 달아났
음이 밝혀졌다.

며칠 뒤 그는 대전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군법회의에서 이런 진술을
남겼다.

"내가 이미 국군을 배반한 반역자가 되었는데 군법회의에 회부되면
필경 김지회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어 이중의 배반자가 된다.
그래서군인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살기 위하여 도망하였다.".

박정희는 최남근의 체포가 바로 자신의 체포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
라는 생각을 했겠지만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는 여수14연대의 반란이 진
압된 뒤 서울로 철수하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과장요원으로 발령받았다.
이 무렵 최창륜이 나타났다. 2년8개월 전에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박승
환등 동지들과 함께 북한에 올라가 인민군 창설요원으로 일했던 최창륜
이 지옥을 경험하고 탈출해 온 것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최창륜은
1기 후배인 박정희를 왕십리의 자기 집으로 불렀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공산주의의 악마성을 열심히 이야기해 주면서 빨리 남로당으로부터 발을
빼라고 설득했다. 박소령이 돌아간 뒤 최창륜은 옆방에 있던 만군후배
박창암(육군준장 예편)에게 "돌아서라고 했더니 박정희는 신중하게 고개
를 끄덕이더구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속).

(조갑제 출판부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