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무기징역에 집행면제 ##.
박정희를 살려준 백선엽 육본 정보국장은 자상하게 그의 뒤를 봐주
었다.
석방시킨 뒤에는 일주일 동안 정양한 뒤 출근하도록 배려했다. 그
사이 백선엽 국장은 박정희 소령을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
냈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 현역으로 계속 근무하도록 한 것이다. 박정
희는 반란기도 사건이 계류중이던 4월까지 석달간 정복차림으로 정상
근무했다. 전투정보과에는 남한반(반장 한무협중위)과 북한반(반장 류
양수중위)이 있었다. 육사6기출신인 한무협 중위는 직속상관으로 모시
면서도 이상한 느낌을 별로 받지못했다. 자신이 육사 생도시절 중대장
이었던 박정희가 "공비토벌에 참여했다가 잠깐 무슨 오해를 받고 풀려
난 모양이다"고 생각했다. 한무협 중위는 3월에 태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주례는 박정희였다. 막상 자신의 가정생활은 평탄하지 못했
다.
최초로 공개되는 박정희와 동거한 이화여대 출신 이현란여인의 사진. 박정희가
숙군수사를 받고 살아나온 직후 그의 용산관사 현관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앞줄 맨 왼쪽 여자가 그때 스물네살이던 이현란, 가운데는 박정희의 바로 위 누님
박재희, 맨 오른쪽은 박정희로서 병색을 띤 초췌한 모습이다. 뒷줄 가운데 남자는
박정희의 조카 박재석. 이현란과 박재희가 안고있는 아이와 뒷줄에 서 있는 소녀는
모두 박재희의 자녀들이다. 뒷줄 오른쪽 인물은 불명. 배경에는 군용 지프가 보인다.
박정희는 1949년2월8일에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과
파면, 급료몰수형을 선고받았다. 이날 선고를 받은 피고인은 박정희
소령을 필두로 69명(장교42명, 사병27명)이었다. 이들의 공통죄목은
국방경비법 제16조 위반(반란기도)이다. '고등군법회의 명령 제18호
(1949년 4월18일자)'에는 박소령에게 적용된 구체적 죄명이 '병력제공
죄'로 되어 있다. 이 문서는 이들 피고인이 '1946년 7월경부터 1948년
11월에 걸쳐 서울 등에서 남로당에 가입,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했다'고 적고 있
다. 박정희는 설치장관(이응준육군총참모장) 확인과정에서 징역10년으
로 감형되고 동시에 형의 집행을 면제받은 것이다. 파격적인 특례였다.
박정희는 또 불구속 상태에서 이런 재판절차를 밟은 것으로 추정된다.
군법회의 재판관 김완룡(초대 육군법무감·예비역 육군소장)은 "박정
희는 남로당에 가입하긴 했으나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았고 군내에
서도 인물이 아깝다는 여론이 일어나 그런 감형이 가능했을 것이다"고
말했다.
육사 생도대장으로 있으면서 생도들을 공산화하는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오일균도 전향했지만 살릴 수 없었다. 수사관
들이 그를 살려야 한다고 건의하여 육군 수뇌부가 회의를 했으나 부결
되었다고 한다. 오일균은 사형집행장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면
서 죽어갔다고 전한다. 박정희는 대통령 시절 충북 청원군을 지나다가
한마을을 바라보면서 "저곳이 오일균의 고향인데…"라고 중얼거리고는
생각에 젖더라고 한다.
박정희가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돌아와 민간인
신분으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고 있던 1949년5월25일 오후2시 수색에서
는 박정희의 좌익선배 최남근에 대한 사형집행이 있었다. 호탕한 성격
과 강렬한 민족의식으로 만군장교들 사이에서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최전 연대장은 여순반란 사건에는 관련이 없었지만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로 형장에 서게 되었다. 그에 대한 총살형을 집행한 것은 문용채
헌병장교였다. 그는 만군장교 시절 최남근과 함께 비밀항일조직에 가
입한 적이 있는 동지 사이였다. 최남근의 군 후배들과 미군사고문관짐
하우스맨 대위도 입회했다. 최남근은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하직인사를 했다. 문용채에게는 "문형! 나 먼저 가요"라는 인사를 남
기고 당당하게 총탄을 받았다. 이 장면을 하우스맨은 활동사진에 담았
다. 최남근의 후배 박창암은 그가 동생에게 남긴 유서를 본 적이 있었
다.
'남오야! 큰형은 좌익 손에 맞아죽고 나는 우익에게 죽는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생각해서 처신하고 아무쪽록 부모님께 잘해
드려라.'.
여순반란 사건 직후부터 1년 이상을 끈 숙군수사로 군대에서 추방
된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숙군수사책임자 백선엽 당시 육군 정보국
장은 "전군이 약8만이던 시절인데 10% 이상이 불명예 제대당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한국전쟁사'는 좌익분자로 분류되어 숙청된 장병
을 8백30명, 연루된 민간인을 5백55명으로 집계했다. 처형된 장교들은
수십명 정도였다고 한다. 육사3기생 출신 장교들 가운데 60여명이 숙
청된 것은 숙군수사의 주역 김창룡이 3기생으로서 훈련을 받을 때 동
기생들내의 좌익세포를 많이 파악해놓았던 데다가 남로당이 3기생부터
조직적으로 침투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전 육군참
모총장은 이 숙군이 대한민국을 살렸다고 말한다.
"그 1년 반 뒤 6·25가 터졌습니다. 초전에 일방적으로 밀릴 때인
데도 국군은 집단투항을 한 부대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중대, 소대 규
모에서도 없었습니다. 숙군이 없었더라면 군내의 남로당 세포가 들고
일어나 국군은 붕괴되었을 것입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