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치기위해 중공군개입 방치" ##.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중공개입의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아 달
라'는 이승만의 편지에 대한 맥아더 사령관의 답장 요지는 이러했다('정
일권 회고록').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 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
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 이 가능성을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넘을 것입니다. 조금도 모
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 중공은 그 방대한 군사력을 배경삼아 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에 있어서 데모크라시의 최대 위협이 될 것입니다. 그 배
후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중공의 잠재적인 군사력을 때릴 만한 기회는
지금 아니고서는 없을 것입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만
워싱턴이 언제까지 본직의 전략을 뒷받침해 주느냐가 문제입니다. 경우
에 따라서는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 하지만 본직의 불퇴전의 결
의는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필요하다
면 원폭도 불사할 것입니다.〉.


사진설명 :
상관과 부하 사이가 아니라 독립국의 정상들처럼 웨이크 섬에서 만난 트루먼
대통령(왼쪽)과 맥아더 원수.

정일권(국무총리, 국회의장 역임, 1994년 77세로 작고)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사령관이 주고받은 이 두 통의 사신을 아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가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극비중의 극비였다. 사
가들이나 비평가들이 이 극비를 알 까닭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
에게 집중되는 비판의 소리, 즉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의 가능성을 오판
하여 유엔군의 북조선 철수를 자초했다'는 명예롭지 못한 책임추궁에도
이 비밀서한만큼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정일권의 이 증언은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중공을 치기
위하여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항간의 음모론을 확
인해주는 결정적 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일권은 육군총참모총장
겸 3군사령관으로서 맥아더의 전략에 대한 가장 신뢰성 있는 정보원이었
다.

성격이 신중하기로 유명했던 그의 이 증언은 다른 자료나 증언들과 비
교하여 검증할 때 더욱 신뢰도가 높아진다.

1972년 일본에서 출판된 '캐논기관으로부터의 증언'이란 책이 있다.
저자는 3년 동안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연정. 묵호경비사령관이
던 연정 해군소령은 1949년9월 이승만 대통령의 추천을 받고 도쿄로 건
너가 맥아더 사령부 산하의 첩보부대인 캐논기관에 소속되었다. 캐논 소
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의 정보참모 윌로비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일본뿐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의 정치-군사
정보 수집을 하고 있던 부대였다.

1950년10월 캐논 소령의 명령에 따라 연정은 한국 민간인들로 구성된
위스키 부대를 지휘하여 대청도-백령도 등 서해안의 도서를 점령하고 여
기서 3∼4명을 한 조로 묶은 수십 명의 첩보원들을 대련, 여순, 신의주
로 침투시켰다. 이들 첩보원들 중에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잘 하는 한국
인들이 끼여 있었다. 14일부터 적진에 침투한 첩보원들로부터 '중공의
대군이 한만국경에 집결, 남하하여 유엔군에 대항할 기세임'이란 보고
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정은 이들 첩보를 윌로비 소장 앞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대군이 이동한 흔적--화덕과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있다. 10개 사단
규모로 추정된다' '진행방향은 신의주, 뒤를 쫓고 있음' 이런 보고에
이어서 곧 '육안으로 중공군 관찰'이란 보고가 들어왔다. 백령도로 귀환
한 첩보원들은 남하하는 중공군 대열에 끼여들어 병사들과 대화를 나눈
사람들도 있었다. 첩보원들은 그런 모험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중공군은 여러 지방에서 소집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어 자기들끼리 말
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더란 것이다. 더구나 이들은 군복을 제대로 지
급받지 못해 그냥 민간인 복장으로 기나긴 대열을 따라가고 있어 거기에
끼여도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상대가 광동어로 이야기를 걸면
이쪽에서는 북경어로 상대하여 기를 죽이는 방법도 썼다.

"마치 하나의 도시가 이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린뱌오(임표) 장군이
지휘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혀를 내두른 첩보원은 촬영한 필름도 내놓았다. 연정은 더욱
확신을 갖고 윌로비 소장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린뱌오 지휘 하의 10
만대군이 신의주의 대안 안동을 향하여 대이동하고 있다. 북한지역으로
남하할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사실은 이 보고 중 린뱌오 부분은 틀린 정보였다. 린뱌오가 지휘하던
제4야전군 출신 병사들이 지원군에 많이 끼여 있었는데 이들은 텅더화이
(팽덕회)가 지원군의 새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북한
에서 초전에 포로가 된 병사들도 '린뱌오 부대원'이라고 진술했다.

이 때문에 미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의 초기 사령관은 린뱌오였던 것으
로 오판했다. 미국의 공간사에도 뒤풀이된 이 오판이 수정된 것은 중공
쪽에서 한국전 자료가 공개되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였다. 맥아더는 자
신이 상대하고 있던 적장을 오인했다는 뜻이다. 이윽고 북한에 침투시킨
첩보원들로부터 '남진한 중공군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첩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정은 일련의 정보를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면서 맥아더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10월15일 태평양상의 작은 섬(웨이크)에서 이상한 정상회담이
열렸다. 맥아더는 낡은 모자를 쓰고 작업복을 입은 채, 그것도 윗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모습으로 트루먼 대통령을 맞았다. 트루먼은 나중에 측근
에게 "내 부하가 만약 그 자처럼 옷을 입었더라면 엉덩이를 차버렸을 것
이다"고 불평했지만 맥아더 원수의 아내가 좋아한다는 블럼 캔디를 선물
로 내놓았다. 공항내 퀀세트 빌딩 안에서 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던 회
담의 종반에 트루먼이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 물었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전쟁이 터진 첫째 혹은 둘째
달에 개입하였더라면 결정적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을 이제는 두
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만
주에 집결한 30만 병력 중 기껏해야 5만∼6만 명 정도가 압록강을 건널
수 있을지 모르지요. 중공군이 만약 평양으로 남진하려고 하면 아마도
역사상 최대의 떼죽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