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명 전사한게 축하할 일입니까" ##.

9사단장으로서 석 달 동안 박정희 참모장과 함께 일했던 김종갑
(육군중장 예편)은 "사단의 안살림을 완전히 참모장에게 맡기고 나
는 작전에만 신경을 썼다"고 증언했다.


사진설명 :
9사단이 인민군10사단을 소탕한 다음 전리품을 구경하기 위해서 부대를 방문한
정일권총참모장(왼쪽에서 두번째). 박정희 9사단 참모장은 오른쪽에서 두번째,
세번째는 이용문부사단장.

"충원, 보급 등 행정적인 업무를 워낙 꼼꼼하게, 또 정직하게
처리해주어 저는 걱정할 일이 없었죠. 솔직히 말해서 작전에 대해서
도 저보다도 더 많이 알더군요. 사단사령부가 자주 옮겨다니고 작전
지역은 넓고 험준하여 지휘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사단장이
대대장얼굴도 모르고 장교들을 한데 모아 훈시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예비연대를 둘 처지도 못되어 훈련과 교육을 제대로 못하니 전투에
서 신병들의 손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1951년 겨울의 강원도 산악전에서 박정희 참모장은 실탄공급보
다도 주먹밥 공급에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전선에서는 연기를 낼 수
없어 후방에서 만든 주먹밥을 일선 사병들에게 날라다 주었다. 그
사이 주먹밥은 얼음덩어리가 되어 있곤 했다. 주먹밥과 실탄수송을
맡은 노무자들의 실정은 더욱 비참했다. 일선 사단마다 이런 노무자
들을 2천명씩 데리고 있었다. 이들은 25∼40세 연령층으로서 기혼자
가 많았다. 1년 기한으로 징집된 이들을 내보내고나면 보충이 안된
다고 해서 기한을 넘기고도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당시 김종갑의 9사단에서는 큰 접전이 없더라도 인민군의 포격
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전사자가 발생했다. 어느 날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올린 작전참모가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김종갑 준장은 박정희 참모장을 불
러 준비를 시켰더니 정색을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 명도 안죽었
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사람의 부모는 아마도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

김종갑 사단장은 속으로 '건방지게 무슨 반대야'라고 생각했었
는데 그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문득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고 한다. 1951년3월3일자로 이성가 준장이 새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1950년 11월말 평양 북방의 서부전선에서 8사단장으로 있을 때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사단이 붕괴되는 사태를 겪었다. 이 책임을
지고 군법회의에 넘어갔다가 사면되어 사단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9사단은 3월6일자로 3군단에서 1군단소속으로 변경되었다. 이성가
사단장이 부임하자말자 정선군 송계리 송계국민학교에 들어 있던
사단 사령부로 '걸어다니는 공수부대' 인민군10사단을 요격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인민군 10사단은 석달 전 국군 9사단 정면을 침
투, 후방깊숙이 진출하여 유엔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 전
술을 구사하다가 국군2사단의 집요 한 추격을 받으면서 약2천명의
잔존병력을 데리고 태백산맥을 타는 귀환길에 올랐다. 9사단의 29,
30연대와 수도사단의 1개 대대는 3월14일 강릉 남쪽 약50km 산악에
서 매복하고 있다가 북상하는 10사단을 때렸다. 그 뒤 열흘간 대관
령, 오대산, 발왕산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9사단은 '쥐잡기 작전'을
벌였다. 주야간 계속된 산악전투에서는 차량과 중화기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연대장도 뛰어다녀야 했다.(30연대장 손희선 증언).

10사단은 도피 및 탈출만 한 것이 아니었다. 국군의 허점이 보
이면 기습도 감행했다. 10사단은 큰 타격을 받고 지휘부와 일부 병
력만이오대산을 넘어 인민군 지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9사단사'
에는 '송계리 전투'로 유명해진 이 전투에서 9사단이 1백15명의 전
사와 77명의 실종, 2백64명이 부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천1백88
명의 적병을 사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약간 과장인 것 같
다. 적생포 6백12명, 박격포 2문과 소총 약9백정 및 30정의 기관총
노획은 정확할 것이다. 인민군 10사단의 침투를 허용했던 9사단으로
서는 결자해지의 통쾌한 복수를 한 셈이다. 박정희 참모장은 쥐잡기
식 소탕작전중 눈덮인 산중에 흩어진 부대원들에게 탄약과 주먹밥을
날라다 주느라 애를 먹었다. 생포한 포로들을 조사해보니 인민군이
남한지역에서 끌어모은 중고교생들과 여자들이 많았다. 인민군이 유
엔군에밀려 퇴각할 때 데려갔다가 다시 끌고 내려온 이들이었다. 이
송계리 전투는 창설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은 9사단에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정일권 총참모장이 부대를 방문해 노획한 장비를 시찰
하고 표창했다.

1951년 전선에 봄이 찾아오자 유엔군은 반격에 나섰다. 3월6일
릿지웨이 사령관은 '리퍼(Ripper)작전'으로 불리는 총반격을 명령했
다. 유엔군은 3월14일 서울을 70일만에 재탈환했다. 중공군은 결전
하지 않고 서울에서 철수했다. 전 전선에서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
하여 동부에서는 38선을 돌파했다. 미국 정부는 서울 재탈환과 38선
돌파란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미 국무부는 휴전제안문 초안
을 만들어 유엔참전국 정부에 회람시킨다. 공산군 남침 이전 상황에
서 휴전하자는 것이 제안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쪽으로 내려가던
1월13일에는 이보다 훨씬 굴욕적인 조건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
었다. 이날 영국 프랑스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휴전안은
'현전선에서 즉시 휴전, 외국군대 철수, 중공의 유엔가입문제를 논
의하기위한 특별기구 구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국의
항복과 한반도의 적화를 의미하는 이 휴전안에 대해서 미국은 찬표
를 던졌다. 만약 이때 중공이 이 제안을 수락했더라면 휴전선은 37
도선에서 그어졌을 것이고 경인, 한강유역이 북한으로 넘어가 남한
은 멀지 않아 적화되었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중공은 '교섭과 동
시에 중공의 유엔가입'이란 조건을 내세우면서 이 유엔 안보리의 제
안을 거부했던 것이다. 미국은 릿지웨이 사령관의 용전으로 38선이
회복되자 이제는 무승부를 추구하려고 했다. 미 합참이 미리 보내준
휴전제안의 초안을 읽어본 맥아더는 선수를 친다. 3월24일 그는 '전
황 분석'이란 발표문을 통해서 '유엔이 전쟁을 제한해왔던 태도를
바꾼다면 중공은 순식간에 군사적 붕괴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고 경
고하고 '적군의 최고사령관과 전선에서 회담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전선사령관이 국가원수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이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
(*이동욱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