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석 사단장과 불화… 전출원해 ##.

박정희는 9사단에서 이용문 대령과 재회했다. 그는 육본 정보국장
으로 전출된 김종평 부사단장의 후임으로 9사단에 부임해왔다. 박정
희가 군내 남로당 사건에 연루되어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서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던 1948년 이용문 정보국장은 박정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진설명 :
1951년 4월 경포대에서 데이트하고 있는 박정희와 육영수 부부.

이용문은 6·25초전 때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남는 바람에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했다. 그는 한강다리가 끊어지자 부하들을 데리고
남산으로 들어가 항전하다가 힘이 다하자 숨어다녀야 했다. 배짱이좋
고 통이 큰 이용문은 땅굴이나 다락방에 숨어 있을 때도 어찌나 태평
스럽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지 아내 김정자는 남편이 밉상스러울
지경이었다고 한다. 서울이 수복된 다음에 이용문은 한직으로 복귀하
여 북진에 참여할 수 없었다. 남강원도 계엄사 민사부장, 육군보병학
교 기획부장,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을 맴돌다가 전전의 대령 계급장을
그대로 달고 9사단으로 온 것이다. 서울을 버리고 달아났던 이른바
도강파가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사상검증을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용문도 군수사기관으로부터 조사를 받았다. 그는 "망할 놈들, 거짓
방송하고 달아난 놈들이 누구를 조사해?"라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때부터 이용문은 이승만 정권을 뒤엎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 가고
있었다. 두 불우한 군인 이용문과 박정희는 9사단에서 부사단장과 참
모장사이로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의기투합했다.

1951년 4월25일 9사단은 1군단에서 3군단으로 배속변경되면서 강
원도 강릉에서 오대산 북쪽 용포리로 이동, 10㎞ 전방을 맡았다. 이
틀 뒤 이성가 사단장이 태백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나가고 최석준장이
후임으로 들어왔다. 그가 부임하자마자 그때까지 박정희 참모장 중심
으로 인화가 잘 유지되던 사령부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어느 날 최석
사단장은 일선을 시찰하다가 연대의 배치가 자신의 명령대로 되어 있
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작전참모 박춘식 중령에게 오후 참모회의
에서 이를 해명하라고 지시했다. 박중령은 박정희 참모장과 함께 작
전 명령이 잘못되었나 조사를 해보았으나 부대배치는 작전명령대로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참모회의에서 박춘식 중령은 사단장이 결재한
작전명령서를 가지고와서 해명했다. 최석 사단장은 "내가 이걸 보고
사인했나, 보지 않고 했지?"라고 억지를 부리면서 작전참모를 모욕적
으로 질책하는 바람에 참모진과 사단장 사이에 큰 금이 가버렸다. 참
모들은 사단장파와 참모장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그때 정훈부장은
'용금옥시대'의 저자이자 시인이기도한 이용상 대위였다. 그의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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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김재춘 병참참모, 이용상, 이 세 사람은 짬만 나면 개울
가로 가서 게를 잡아 안주로 삼았다. 문제는 술인데 후방에서 귀하게
구해온 정종이나 국산 위스키가 없으면 의무실에서 에틸 알콜을 가져
와 물에 타서 마셨다. 어느 날이었다. 박정희 참모장 막사에 참모들
이 모여 있는데 김시진 헌병대장이 강릉에 갔다오는 길이라면서 생선
회 한접시와 위스키 한 병을 들고 오더니 놓고 나갔다. 그리고는 옆
에 있는 사단장막사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한 참모가
박정희 대령에게 말했다.

"참모장님 이상한데요. 사단장님이 평소 술도 좋아하지 않는데 이
야전에서 웬 생선회를 찾을까요.".

참모들은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귀를 사단장 막사로 기울였다.
관련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상황은 대체로 이런 식으로 진
행되었다.

"생선회 왔습니다."
"그래, 그래 빨리 빨리 들어오라고 그래.".

최석 사단장이 급히 야전의자를 펼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시진은
자기 보고 앉으라는 신호인 줄 알고 의아했다고 나중에 실토했다. 영
문을 모른 김시진은 "사단장님 시키시는대로 동해안에 가서 싱싱한
생선회를 가져왔습니다"라고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빨리 들여보내라고."
"글쎄, 여기 생선회가….".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참모장실에서 귀를 기울이던
박정희 이하 참모들은 웃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사단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내가 살아 있는 생선 먹고싶다고 했지 죽은 생선
먹고싶다고 했나. 눈치도 없는 놈아.".

군내에서 유명해진 이 '생선사건'의 후일담이 있다. 5·16거사 직
후 김시진은 반혁명분자로 몰리고 있었다. 혁명주체 김재춘이 박정희
소장을 찾아가 말했다고 한다.

"9사단에 있을 때 그 사람은 생선이 물고기인 줄 알 만큼 순진한
사람이란 사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데려다가 씁시다.".

김시진은 청와대 정보 비서관으로 발탁되었고 집에서 쉬고 있던
최석 예비역 장군도 박정희의 배려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원으로
구제되었다. '생선사건'이 있은 며칠 뒤 박정희 참모장은 아프다면서
출근을 하지 않더니 의무부장으로부터 진단서를 끊어와서 사단장 앞
에 내어놓고는 대구 집으로 정양을 가야겠다고 했다. (계속).

(*조갑제출판국부국장*) (*이동욱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