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년말 준장 달고 미포병 학교 유학 ##.

3군단 포병단장 박정희 대령 밑에서 작전참모로 일했던 이는 육사 8
기 오정석(준장 예편) 중령이었다. 그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포술학 과장
으로서 박정희를 가르친 사람이었다. 박정희 학생은 지독하게 공부했다
고 한다. 밤에 교관을 숙소로 불러 과외공부를 하기도 했다. 졸업 때 박
정희는 2등이었다. 오정석 작전참모는 박정희 포병단장이 참모들에게 강
조하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사진설명 :
박정희 3군단 포병단장의 전속부관이었던 '새 박사' 원병오 경희대 교수.

"군단에서 지시가 내려가면 말단 부대의 소대장에게 전달된다. 그
후 사병들이 일을 하게 된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물어보면 소대장
은 현장에 가 보지도 않고 전화로 중대장에게 '예, 명령하달했습니다.잘
되어 갑니다'라고 보고한다. 중대장은 다시 대대장에게, 대대장은 연대
장에게,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이런 식으로 보고한
다. 이래 가지고는 일이 안된다. 귀와 입으로 일하면 아무 것도 되는 것
이없다. 다리와 눈으로 일하라".

오정석 예비역 장군은 "'명령은 5%이고 확인과 감독이 95%'라고 말
하곤 했는데 그 말이 저의 군 생활에서 하나의 지침이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박정희는 야외훈련을 할 때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여 "날아가는 새
는 앉은 자리가 깨끗하다. 사람은 앉은 자리보다 떠난 자리가 깨끗해야
한다"라고 했다. 박 대령은 부대가 떠날 때는 현장에 나와서 취사장과
화장실이 있었던 곳을 꼼꼼히 챙겼다. 전속 부관 원병오(경희대학교 조
류학 교수)에 따르면 참모들 중에는 엄격하고 돈을 모르는 박정희 밑에
서 일하기를 꺼려 전출 운동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53년 여름 박정희는 대구에서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했다. 방이 둘
인 셋집이었다. 천장이 낮은 이 집은 서향이어서 오후가 되면 햇볕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육영수는 오후가 되면 근혜를 업고 동생 예수가 쓰는
아랫방으로 옮겨가야 했다. 문지방이 높았던 이 집은 막걸음마를 시작한
근혜에게 시련을 주었다. 수시로 발이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이마가 성
할 날이 없었다. 박정희의 당시 월급은 쌀 한 가마 값에도 못미치는 2만
환 정도였다.

이해 10월 박정희는 다시 고사북동의 독채 집으로 이사갔다. 지금의
성북구 보문동 파출소 뒤편 언덕바지의 방 세 칸에 현관이 달린 일본식
집이었다. 원병오 부관의 사촌누나 집이었는데 원 중위의 간청으로 세든
사람을 내보내고 박정희 대령에게 세를 주었다. 박정희는 전세금을 낼
돈이 없어서 월세를 냈다. 나중에 어떤 사정으로 원 중위의 누님이 박정
희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했다. 육영수는 원병오에게 "이야기를 좀 잘 해
달라"고 사정하여 계속 머물 수 있었다. 원 부관이 어느 날 박정희 단장
집에 들렀더니 육영수는 옷가지를 챙기고 있었다. 눈치를 보니 내다 팔
옷을 고르는 것 같았다. 원 중위가 가면 육영수는 국수를 자주 내놓았다.
멸치를넣지 않은(또는 못한) 국물에 넣은 국수였다. 원 중위의 눈에 비
친 남편으로서의 박정희는 '무뚝뚝하고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다. '저런
남편하고 무슨 재미로 살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박정희는 술에 취
해 귀가하면 문을 두드릴 때만은 다정하게 "영수! 문 열어"라고 했다.

그때 26사단 참모장으로 있던 김재춘 대령은 옛 상관 집을 찾아갔다
가 우선 집을 한 채 지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6사단 지역에는 전
쟁중에 포탄과 총탄을 맞아 쓰러진 나무들이 많았다. 이 나무들을 잘라
박정희 집에 가져다 주려고 춘천에 쌓아 놓았는데 헌병에게 들켜 압수되
어 버렸다.

박정희는 1953년 11월 25일에 준장으로 진급했다. 포병으로 전과한
덕분에 승진이 빨랐다. 이 무렵 박정희는 미국 육군포병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육군특무대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연루
전력을 문제삼아 탈락시키려 했다. 박정희는 원병오 중위가 보는 앞에서
신경질을 냈다.

"누가 가고싶어서 가는 줄 알아? 위에서 가라고 해서 가는 건데. 그
따위로 놀면 차라리 군대 그만 두겠어.".

육본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종필 중령이 처삼촌의 사정을 알고는 동
기생 전재구 중령을 찾아갔다. 전 중령은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비서실
장이었다. 전 중령은 백 대장에게 보고했다.즉석에서 백 총장은'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전화를 걸라'고 했다.

"어이, 창룡인가. 그 박정희 준장 건 말인데 우리가 살려 주었잖아.
그러니 끝까지 봐주자고. 그 사람도 미국 갔다 오면 많이 달라질 거야.".

김창룡은 "예, 예"만 연발했다. 이승만의 특별한 신임을 배경으로
하여 군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김창룡도 백선엽 총장한테는 꼼
짝을 못했다. 숙군수사 때 백선엽 당시 정보국장 아래서 일한 인연도 있
지만 그 전에 김창룡은 큰 은혜를 입었었다. 1연대 정보주임이던 김창룡
의 부하들이 좌익용의자를 수사하다가 고문해서 죽였다. 김창룡은 그때
는 직속상관도 아닌 백선엽 국장에게 달려갔다. 백선엽은 김창룡을 데리
고 유족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수습을 해주었고
김창룡은 무사했던 것이다.

박정희 준장을 비롯한 25명의 포병장교들은 1953년 크리스마스 직후
대구에서 미군 비행기를 탔다. 일본의 미공군기지 다치카와 비행장에 내
렸는데 다음 비행편을 기다린다고 한 일주일을 대기했다. 호놀룰루를 거
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미군측에서는 세단을 내주어 박정희 준장,
이상국 대령 등 고급 장교들이 관광을 하도록 했다. 유학생들은 로스앤
젤레스에서 오클라호마주의 포트 실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박정희에게
는 만주, 일본에 이은 세번째의 외국나들이였다. 전쟁통을 막 벗어난 조
국의 현실과 비교할 때 눈앞에 펼쳐진 미국의 풍요함과 거대함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을 것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박정희는 과묵함을 유지
했다. 미국에 유학간 한국군 장교들이 써 보내는 편지에는 '자동차의 홍
수, 빌딩의 숲'이란 귀절이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갈 때였다.

1954년 1월부터 시작된 박정희 유학생의 포트 실 생활은 겉으로는
단조로웠다. 유학반은 한국군 통역장교를 데리고 갔고 우리 말로 번역된
교재를 썼다. 포술학, 전술학, 자동차학, 실습 따위 과목은 박정희가 한
국에서 배운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보다는 미국, 미국인, 미국사회,
미국군대에 대한 체험이 진짜 교육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