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형에 편지 "군사업 청탁 마십시오" ##.
1960년 1월하순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이 처음 기자들과 만나는 날
부산문화방송 전응덕 보도과장이 마이크를 갖다대면서 '부임 소신을 피
력해달라'고 했더니 박정희는 마이크를 밀어버리면서 말했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매형에게 보낸 청탁 거절의 편지.
"우리 뭐, 이런 딱딱한 분위기는 치워버리고 얘기나 합시다. 나는
경상도 사람이라 부산에 오니까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습니다. 뭐 물을
것있으면 물어보십시오.".
상투적인 '부임소감의 피력'은 생략했다. 부산일보 군출입 기자 김
종신이 나섰다.
"부산에 있는 부대들은 말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오셨을 텐데 앞으
로 부대 운영은 어떻게 해나갈 작정입니까.".
박정희 사령관은 한참 있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잘해 나갈 작정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박정희의 얼굴에는 엄숙함과 함께 기자들을 비웃
는듯한 냉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 비웃음은 기자들에 대한 박
정희의 생각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9사단 참모장 박정희 아래서
정훈장교로 근무한 인연으로 그 뒤로도 오랫동안 교분을 유지하고 있던
이용상 대령은 그때 국방부 보도과장이었다. 그는 "박 장군은 구상, 장
덕조, 김팔봉같은 문인출신 언론인들하고는 절친했지만 다른 기자들을
대체로 경멸했고 기피했다. 기자들도 약점이 별로 없는 박 장군을 무서
워 했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기자들을 호칭할 때는 '그 자식들'식으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이용상은 "당시 일부 군장성들과 일부 군출입기
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부패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했다.
"일부 고위장교들은 부정때문에 기자들에게 약점이 잡혀 있었고 또
언론을 통해서 경무대에 잘 보이려고 기자들을 매수하기도 했습니다.
군의 문제점을 보도하는 데는 거의 자유롭던 시대이니 장성들은 기자들
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출세에 이용하려고도 했지요. 6관구 사령관 시절
박정희 장군은 그런 기자들과의 접촉은 김재춘 참모장한테 맡겨놓고 직
접 만나지는 않으려 하더군요.".
기자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가는 장성들의 자세나 자질에 달린
것이기도 했다. 군수기지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를 부산의 군출입기자
들은 달리대하게 되었다. 젊은 기자가 젊은 장성들(그때 장성들은 거의
가 30대였다)에게 친구처럼 접근하던 시절인데 박정희는 위엄이 풍겨
함부로 말을 붙이기도 어렵고 잡담을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신보의 설영우 기자는 "박 장군이 온 뒤에는 우리 기자들의 자
세가 달라졌다"고 했다.
이 무렵 박정희의 심중을 엿보게 하는 편지 두 통이 있다. 한 통은
그가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한 직후 매형 한정봉에게 보낸 편지이다.
한씨는 박정희보다 네 살 위 누님 박재희의 남편으로서 그때경북 상주
에서 살고 있었다. 맡춤법만 손을 본 뒤 원문대로 옮긴다.
.
70만 대군이 쓰는 물자공급을 책임진 군수기지사령부는 이권이 가
장 많은 부대였다. 더구나 한정봉은 박정희가 교사직을 버리고 만주군
관학교에 들어갈 때나 광복 뒤 박정희가 고향에서 실업자 생활을 하고
있을 때 물질적인 도움을 많이 준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매정하
게 그의 부탁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박정희는 쿠데타 구상을
구체화시키고 있었다. 목숨을 거는 독한 결심을 한 마당에 사사로운 부
탁은 더욱 그의 안중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
박재희 누님이 서울로 이사오자 경찰관들을 집 주위에 배치하여 청탁자
의 출입을 감시하도록 했다.
박정희가 문경보통학교 교사이던 때 제자였던 정순옥은 결혼하여
3남매를 둔 주부가 되어 있었다. 1959년 봄 박정희가 1군 참모장으로
있을 때 편지를 썼다. 박정희 소장이 이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보낸 것
을 정순옥 할머니는 보관하고 있다.
<20년 전의 추억을 더듬으면 천진난만한 순옥이의 소녀시절의 모습
이 떠오르지만은 지금은 3남매의 어머니가 되었다니 모습도 많이 변했
겠지. 뜻밖에도 보내주신 서신 반가이 배독했습니다. 대구에 있을 적에
순옥이 부친께서 찾아오셔서 순옥이 이야기도 잘 듣고 태영이 이야기도
잘들었는데 그 후 태영군이 출정하여 소식이 없어졌다니 안타까워하시
는 부모님의 심정 무엇에 비할 것인지. 순옥인들 얼마나 슬퍼했을까?
삼남매의 어머니가 된 순옥이를 순옥이라고 불러서 어떨는지. 그러나
옛날어릴 적의 생각으로 순옥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다정스러울 것 같
으니 용서를 하시도록. 가끔 옛날 제자들로부터 편지를 받고 소식을 듣
는 것이 가장 기쁜 일이라오. 그래 부군께서는 무엇을 하시며 3남매는
모두 몇 살씩이나 되며 가정의 재미는 어떠하신지. 서울에는 나의 가족
들도 살고 있으니 언제 한번 가족끼리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하고 있어요. 우리 집도 딸형제를 가진 가정이 되었다오. 다음 기회에
가족동반으로 옛날 이야기나 실컷 하도록 연락을 해주길 바라네. 친정
부모님들은 지금도 문경에 살고 계시는지? 사촌 복영군은 동래 병기학
교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도 그곳에 있는지. 그럼 내내 안녕하
시기를 축복하오며 상봉의 기회를 고대하면서 오늘은 이만 붓을 놓겠습
니다. 5월1일 박정희 배.>.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개인적인 편지나 봉투에는 절대로'대
통령'이란 직책을 쓰지 않고 '박정희 배'라고만 표기했다. 공적인 자리
에선 찬 바람이 일고 매정한 박정희는 사적인 자리에선 다감하고 겸손
한 사람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