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⑮ 도의 대 기백 논쟁 ##.

자신이 뒤집어 엎으려고 했던 이승만 정권이 학생 시위로 넘어가
는 것을 바라보는 박정희 소장의 심정은 복잡했다. 4·19 이전에 박
정희를 만났을 때 친구 황용주(당시 부산일보 주필)가 전국으로 번
지고 있는 학생 시위를 설명해주면 박 소장은 "에이, 술맛 안난다"
고 내뱉었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었다는 안타까
움의 표현이었다.


사진설명 :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 시절의 이병주.

이낙선이 작성한 '5·16혁명 참여자 증언록'에 따르면 4월19일
유혈사태로 서울, 부산 등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자 그날 밤 부산
동래에 있는 박정희 관사엔 김동하 해병 상륙사단장과 홍종철 중령
이 마주앉았다. 박정희는 "학생들이 맨 주먹으로 일어났으니 그들을
뒷받침해주자"고 말했다는 것이다. 4월26일 밤 박정희는 관사로 찾
아온 유원식 대령이 "이제 혁명을 해야 할 때입니다"라고 하자 "혁
명이 됐는데 또 무슨 혁명을 하자는 거냐"고 핀잔을 주었다.

박정희는 이승만 하야 직후 황용주를 만나자 대뜸 "아이고, 학생
놈들 때문에 다 글렀다"고 했다. 황용주는 놀리듯이 말했다고 한다.

"봐라, 쇠뿔도 단 김에 빼라카니.".

소설가 이병주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있던 국제신보의 4월27일
자 사설은 '이대통령의 비극! 그러나 조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
다'는 제목이었다. '지금 이 대통령의 공죄를 논할 시기가 아니다.

공을 매거하기 위해서도 신중해야 하며 죄를 따지기 위해서도 신
중해야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평생을 조국광복에 바친 지
도자이며 이 나라의 원수가 이처럼 증오의 대상이 되었는가에 있다.
(중략). 면종복배 또는 피동적이었든 해방 전, 해방 후 이날까지 위
대한 지도자로서 존경한 그분에 대해서 설혹 본심의 발로일지언정
결정적인 반대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저를 사랑한다.

그러나 로마를 더 사랑한다. 브루투스는 시저를 죽이고 나서 그
의 소신을 이렇게 피력했지만 대의와 명분, 정의와 이상에 즉한백천
의 이론을 준비해도 우리들의 감정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딜레마
가 있다. (중략).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항거한 젊은 학생들과
항거를 당한 이승만 박사가 결코 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
이 인식해야 하고 끝내 그렇게 되도록 피차의 성의가 있어야 되리라
고 믿는다' 며칠 뒤 박정희는 이병주, 황용주와 어울린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
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 것
이 아닙니까."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대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
"그거 안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이나 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사고방식이 돼 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겐 필주
를 가해야 해요.".

이에 대해서 이병주는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바친 전공을 보
아서도 이승만을 가혹하게 비판할 수 없었다는 심경을 피력했다. 박
정희의 반응은 차가웠다(이병주의 '대통령들의 초상').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
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
들 독립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운동 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황용주가 끼여들어 "그렇게 말하면 쓰나?"하고 나무랐다.

"물론 엉터리 운동가도 더러 있었겠지. 그러나 싸잡아 독립운동
한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돼. 진짜 독립운동한 사람들도 많
아. 그 사람들 덕분에 민족의 체면을 유지해온 것이 아닌가."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박정희는 흥분했다.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나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운동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그건 또 문제가 다르지 않는가.".

"무슨 문제가 다르다는 기고. 독립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 아이가. 그 습성이 해방직후의 혼란으로 이
어진 기란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
"그런 식으로 문제를 세우면 되나, 내 말은….".

이 때 동석했던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 조증출이 "느그들 이랄
라면 나는 가겠다"고 일어서는 바람에 논쟁이 중단되었다. 이병주는
이런 자리에서 있었던 황용주와 박정희의 논쟁 중 다른 한 토막을
기록했다.

. (계속).

(*조갑제 출판국부국장*)
(*이동욱 월간조선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