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은 참 먼길을 돌아 출발선에 다시 섰다. '안개는 여자
처럼 속삭인다'에서 시작해 몇 작품을 발표한 뒤 '남부군' '하얀 전
쟁'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같은 수작으로 확고한 중견 자리에 올랐
다. 지난해 흥행을 의식한 '블랙잭'이 정작 관객동원에 실패하자 그
는 '까'(21일 개봉)에 도전했다.

92년 어느 방송사 탤런트 연수과정에서 물의를 빚었던 누드수업
실화에 바탕한 이 영화에서 그는 마치 다시 신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
처럼 보인다. 처음 자리로 돌아와 연기 본질을 파헤치면서 몰두한 화
두는 결국 영화를 포함한 창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용우(박용우)와 은숙(조은숙)은 탤런트 시험에 함께 합격한다. 독
특한 강의를 하던 강 교수(강만홍)는 경쟁심으로 연수생들이 갈등을
빚자 모든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는 의식을 갖는다.

'까'는 도발적이다. 제목부터 전투적이다. 시작하자마자 대변이
양변기에 쓸려내려가는 장면을 잡아 공격대상을 분명히 한다. 모든
고정관념을 벗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는 주제는 출연진이 한 데
어울려 알몸뚱이로 달려나가는 라스트에 응집해있다.

하지만 주인공을 바꿔가며 코믹하게 이어달리는 이야기들은 주된
흐름과 동떨어져 당혹스럽다. 계산한 편집에 따라 웃는 입과 휘둥그
런 눈을 매개로 에피소드들을 잇지만 접점에 필연성이 없다. 건달이
휘젓는 버스에서 술수가 판치는 연예계까지, 세상은 정글이라는 외침
역시 마찬가지. 게다가 영화는 고정관념에 칼끝을 겨누면서도, 캐릭
터나 상황은 평면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다. 강렬한 전복 의지와 구태의
연한삽화 사이 부조화가 아쉽다.

(* 이동진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