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2000년 1월 1일 0시 시작되는가, 2001년 1월 1일 0시
인가. 1999년 새해가 밝으면서 '세기 개시년 논쟁'에 붙었다. 조
선일보가 신년호부터 20세기를 정리하는 '20/21, 아듀 20세기' 연
재를 시작하면서 미국 텍사스 A&M대학에서 오하이오주립대에서,캐
나다 뱅쿠버 등 해외각지와 국내에서 인터넷을 이용, 이의를 제기
하고 견해를 밝히는 E메일이 쇄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세기 개시
년을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19세기 말 한국은 단
기나 대한제국 황제의 연호는 알았을지언정, 기독교적 '세기'의
개념은 거의 도입되지 않았을 때이기 때문이다. 논쟁의 역사와 논
리적 근거를 정리했다. (편집자주).
1901년 1월1일 뉴욕시청은 '웰컴20세기'를 밝히는 네온장식을 했다. 19세기말만
해도 고급문화-정통파가 세기 기점 논쟁에서 우세를 보이던 때였다.
일본 도쿄 신주쿠역 앞 건물 옥상엔 10년전부터 '21세기 대시
계'가 서 있다. 21세기 개막을 2001년 1월 1일로 보고, 그때까지
남은 날수(일수)를 표시하는 시계다. 그러나 작년 8월 24일자 아
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 동쪽 끝(호카이도)과 서쪽 끝(오키나와)
에 세운 '20세기 남은 날 게시판'은 좀 다르다.
2000년 1월 1일까지와 2001년 1월 1일까지의 남은 날 수(일수)
가 나란히 적혀 있는 것이다. 일본 사회가 '2000년 개시설'과 '2001
년 개시설' 사이에서 고심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
세기가 개막됐을 때 게이오 대학에서 지도층 인사들이 운집한 가
운데 축하파티가 열린 것은 1901년 1월 1일이었다.
1996년 12월 뉴욕타임스는 한발 더 나아갔다. "1999년 12월 31
일 심야, 시계가 오전 0시를 알릴 때 세계 수십억명의 사람들은
새 밀레니엄의 개막을 축하할 것이다. 그리니치 천문대는 새로운
밀레니엄 개시는 2001년1월 1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리니치는
이미 시간관리자가 아니다. 전세계에 설치된 150여개의 원자시계
가 가리키는'세계 단일 시간'이 그리니치의 표준시간을 대신하고
있다."지난 수세기 동안 100년마다 한번씩 되풀이됐던 이른바 '세
기 개시년 논쟁'. 여기서 절대 우세를 누렸던 '…01년 개시설'이
위축되고'…00년 개시설'이 힘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90년대
들어 서구와 일본 등에서 20세기를 정리, 회고하기 위해 나온 연
표나 해설서 사진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1900년 1월 1일부터를 20
세기의 기점으로 잡고 있다.
최근 '밀레니엄에 대한 궁금증'(Questioning the Millenium)이
란 책을 낸하버드대 스티븐 J 굴드교수는 이 논쟁에서 '…00년설'
과 '…01년설'의 대립은 이성과 감성, 고급문화와 대중(서민)문화
의 대립이었다는 흥미있는 주장을 편다. 기록을 통해 볼 때 이 논
쟁은 18세기 개막을 앞둔 1699년∼1701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이
후 20세기를 앞둔 19세기 말까지 승자는 언제나 이성-고급문화-권
력자 쪽이었다. 이들의 논리는 철벽같다. "하나의 세기(century)
는 100년이 아니면 안된다. 최초에 예수 원년(A.D.)을 정한 게 '0
년'이 아니고 '1년'이었으므로 1세기는 1∼100년, 2세기는 101∼200
년인게 당연하다."19세기 말의 논쟁은 전형적인 고급문화-대중문
화 대립 구도였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나 지그문트 프로이드같
은 극소수가 1900년설을 지지하긴 했다. 그러나 독일을 제외한 전
세계 주요국의 세기 개막 축하 파티는 모두 1900년 12월 31일부터
1901년 1월1일에 걸쳐 열렸다. 하버드대 예일대 코넬대 등 미국
동부 명문들로 이뤄진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들이 공식적으로 1901
년 1월1일설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이 주장의 고급문화적 속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20세기말이다. 19세기 사람들과 달리 20세기 인들은 자
동차 거리 계기판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계기판의 숫자가
'9999㎞'에서 '10000㎞'로 바뀌는 순간의 극적인 변화와 단절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언제를 세기말로 볼 것인지는 이
미 승부가 난 게임 아닌가. 이게 굴드 교수의 주장이다. 20세기는
또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이 이미 없어져 버린 시대다. 베니
굿맨과 윈톤 마살리스 같은 재즈 뮤지션들은 재즈 밴드와 클래식
오케스트라 양쪽에서 연주하고 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포
기와 베스'를 상연했다. 고급문화의 유산에 매달리기 보다는 숫자
의 상징성, 대중들의 현실감각에 더 충실한 것이 필요한 시점 아
닌가고 굴드 교수는 분석한다.
어느쪽을 지지하던 역사상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특혜를 우리는 누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