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년대엔 레비 스트로스 부부 사랑채서 유숙 ##.
♧ 여왕이 나보다 한 살 많은 호랑이 띠제. 김치하고 고추장 만드는
걸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해.".
오는 4월 21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을 맞게 되는 경북 안동 하회마
을 서애종가 충효당의 종손 류영하(73)씨는 마치 가까운 친구가 방문하
는듯이 담담하고 느릿느릿하게 영국 여왕을 맞는 소감을 말했다.
내로라하는 대영제국의 여왕을 맞는 충효당이지만 마치 이 마을을 유
유히 돌아 흐르는 낙동강처럼 여유로웠다. 안방에서 평소 제사를 지낼
때나입는 갓을 손보고 도포를 다림질하는 종부 최소희(71)씨의 손끝에
서야 겨우 손님맞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바깥에서는 안동
시에서 영국대사관 측에 제공할 사진자료를 찍느라 분주했지만 종손 부
부는 태평이었다.
"자꾸 이것저것 떠들면 안 온다고 해서 더 이상은 '노 코멘트'." 종
부가 매몰차게 그 대목은 묻지 말라고 뿌리쳤지만 종손 류씨는 슬슬 여
왕맞이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2월에 1등 서기관이 찾아와서 여왕이 이곳을 방문했으면 한다고 처
음 얘기를 했제. 우리야 영광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나중에 브라운
대사가 정식으로 찾아와 방문을 공식적으로 요청하더구만.".
충효당의 솟을대문 앞에서 여왕을 영접하게 될 류씨는 이미 사전 시
나리오를 받아 두었다는 듯 여왕을 맞는 절차도 설명했다.
"무슨 시간이 그렇게 없는지 두 딸하고 사위 가족은 소개도 못하게
하대. 마을 사람들이 한쪽으로 쭉 서고 직계 가족만 내가 소개하게 돼
있어. 여왕이 오면 두 아들 내외, 손자를 소개하고 안으로 모셔 들어갈
예정이야." 류씨가 여왕을 영접해 들어오면 종부를 비롯한 집안의 여자
들은 안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왕의 희망을 좇아 곧바로 김치와 고추
장 만드는 법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했다.
충효당의 솟을대문을 넘어서면 헌칠한 기상의 사랑채가 손님을 맞는
다. 재상까지 지낸 서애 류성룡(류성룡)이었지만 생전에는 이런 큰 집
에서 살지못했다. 이곳에서 20여리나 떨어진 풍산군 서미동의 한 초가
삼간에서 살다 청빈한 삶을 마쳤다고 한다. 이 사랑채는 후대에 그의
업적을 기려 유림의 제자들이 만들어 준 것이다.
거기서 마당 왼쪽으로 쪽문을 하나 지나면 종손 부부가 거처하는 안
채가 나온다. 아직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널찍한 안채의 대청 마루가
여왕이 9첩생일상을 맞게 될지도 모르는 곳이다. 뒷뜰로 난 들창문으로
하회마을의 주산인 화산이 내다보이는 이 종가집 대청마루가 대영제국
여왕의 생일파티장이 될 지 여부는 아직 검토단계에 있다고 안동시 관
계자는 전했다.
하지만 종부 최씨는 "우리 집에서 하지 않겠나…"하고 말꼬리를 흐리
면서도 귀한 손님을 맞고 싶은 바람을 숨기지는 않았다.
종손 부부에게 이런 외국손님 맞이가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다. 실제
로 적잖은 외국 손님들이 그동안 이곳을 찾았고 게중에서는 충효당의
바깥사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고 간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종손 류씨가 일제 당시 서울 덕수심상소학교(현 덕수초등학교)로 전
학하면서 시작된 서울생활 30여년을 정리하고 돌아온 지난 70년대초쯤
의 일. 환갑에 접어든 한 벽안의 노학자가 막 40줄에 접어든 젊은 종손
을 찾아 왔다.
프랑스의 유명한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였다.
"밥을 먹는데 너무 많아서인지 다 못 먹었지.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밥을 많이 주는 건 한국이 그동안 못살아왔기 때문인 것같다'고 말하
더군. 어떤 원시문명에도 고도의 질서와 조화가 있다고 생각한 훌륭한
학자였지.".
종손은 당시 금기 하나를 깼다. 레비 스트로스 부부를 사랑채 작은
방에 유숙시킨 것이었다. 원래 양반가 사랑채에는 여자가 잘 수 없도록
돼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하나. 멀리서 온 손님인데…. 할 수 없이 사랑채 큰 방은
못주고 작은 방으로 내줬어.".
충효당을 자주 찾은 또 한명의 외국 손님은 3대 주한 영국대사를 지
낸 존모간씨. 안동을 너무 좋아해 몇차례나 이곳을 찾았던 모간씨는 82
년말 종손에게 전화를 걸어 한번쯤 그 댁 사랑채에 묵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한다. 종손은 "지금은 추우니 따뜻한 봄에 오라"고 미뤘는
데 뜻밖에 대사는 엄동설한인 83년 2월에 이곳에 와서 하루를 묵고 갔
다. 전임 발령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 부인이 밍크 코트를 입고 왔는데 늘씬한 미인이었어. 그 내외도
사랑채 작은 방에서 묵고 갔지. 내 짐작에 영국 여왕이 오게 된 데에는
그사람 영향도 있지 않나 싶어.".
그 외에도 일본의 다큐멘터리 작가로 일제하 한국인 징용 등에 대한
작품을 썼던 스미다(증전)라는 이름의 팔순 할머니, 이름 모를 미 브라
운대학 총장 등이 이곳에 와서 '한국'을 보고 갔다고 한다. 문화재관리
국이 "한국을 보고 싶다"는 외국인들은 어김없이 '종가집의 대표'에 해
당하는 이 충효당으로 데리고 오기 때문이다.
한때 의학을 공부하기도 했던 류씨가 동덕여고에서 생물 교사로 지
내다가 느닷없이 부친의 부음을 받고 내려온 뒤 이곳에서 보낸 종손 생
활은 27년.
그 어느 종가보다도 가장 잘 보존된, 그리고 잘 알려진 문화상품으
로 자리를 잡은 충효당인지라 종손 류씨는 그만큼 안정된 생활을 해왔
다. 짬짬이 찾아오는 외국 손님을 맞는 일도 이 유서 깊은 종가의 종손
이 아니면 누리기 힘든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회마을 입장 수입에서
나오는 지원금, 여기저기서 나오는 후원금도 먹고 살기에 부족할 정도
는 아니었다. 2남2녀가 모두 이곳에서 잘 성장해 분가를 했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종가집 종손 생활이 '후대에 두고두고 물려줄
좋은 생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했다. 수시로 안채 문을 빼꼼히
열고들여다보는 염치없는 관광객과 손님들 때문에 자주 집을 비우는 생
활에서 어쩔 수 없는 종손생활에 대한 염증을 엿볼 수 있었다. 하루 두
갑씩 피는 담배와 10잔을 마다 않는 커피가 이 무료한 삶의 유일한 벗
인지도 모른다.
말 첫머리에 툭하면 "양반이…"라는 말이 붙어 나오고 "종손은 숙명"
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류씨도 앞으로 자신처럼 살아야 할 차종손 류
창해(41·회사원·대구 거주)씨에 대해서는 안쓰러움을 느끼는 듯했다.
"네가 한 10년은 더 버텨야지. 손녀도 대학을 가고…" 아직 건강에
문제가 없다는 종손의 이 말에서는 차종손이 조금이라도 도시 생활을
더 오래 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은 아비로서의 바람이 짙게 묻어나고 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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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마치고
영호남 남인 '4백년 우정'
해남 윤씨 종가와 '해묵은 교류' 이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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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의 종손들을 만나다 보면 잠시 수백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
각을 할때가 있다. '남인, 노론, 동인…'을 들먹이는 당쟁 얘기가 대
표적인 예이다.
풍산 류씨 종가도 그 점에서는 빠지지 않는다. 경북 안동의 이 집안
이 호남 남인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전남 해남 윤씨 가문과 쌓은 '400
년우정'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나들이철인 봄 가을이면 충효당 종가는 가끔 호남에서 오는 큰 손
님을 맞을 때가 있다. 꼭 때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멀리 전남
해남의 해남 윤씨 종손이 관광차 왔다가 가끔 들르곤 하기 때문이다.
종손 류영하씨가 선친이 작고한 뒤 이곳에 내려와 종가를 지키기 시
작한 것이 70년대초. 마침 관광차 이곳에 들렀던 해남 윤씨 종손 윤형
식(66)씨가 충효당을 방문하면서 이 우정은 시작됐다.
몇해 뒤에는 류씨가 전남 해남에 들러 고산의 녹우당 종택을 들렀다.
융숭한 종손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교류는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수년 전까지 해남 윤씨의
종손인 윤형식씨가 몇차례 이곳을 들른 적이 있고 윤씨의 맏딸도 관광
차 와서 충효당에 인사를 온 적이 있다고 한다. 류영하씨도 지난해 해
남 가는 길에 고산 고택을 들렀다.
종손들이 만나서 나누는 얘기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올라간다.
두 집안의 현조(그 업적을 널리 떨친 조상)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와서애 류성룡(1542∼1607)이 모두 남인 출신. 그 옛날 노론으로부터
핍박받는 얘기와 조상에 대한 덕담이 대화의 주종을 이룬다고 한다.
400년 가까운 세월과 영·호남 지역차를 훌쩍 뛰어넘는 현대에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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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류씨 가문
명재상 류성룡 배출한 영남의 토성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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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산 류씨는 안동 하회마을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살아와 하회 류씨
로도 불리는 영남 지방의 토성 가문이다.
조선 중기 때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 조선
중기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류중영과 그 두 아들인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 등을 배출하면서 조선조의 명문가로 떠올랐다. 지금도 이 두
명신의 종가인 양진당과 충효당이 풍산 류씨 집성촌이기도 한 하회마
을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애선생의 형인 겸암서생은 풍산 류씨 13대 종손. 퇴계 문하의 초
기 문인으로 원주목사를 지냈다. 같은 퇴계 문하의 서애 류성룡도 임
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전란을 원만히 수습해 조선조의 명재상 반열
에 올랐다. 그 후손들을 겸암파, 서애파로 부르는데 지금도 이 두파가
풍산 류씨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시조는 고려 중기 호장을 지낸 류절. 인근 풍산에서 하회로 옮겨
정착한 것은 시조의 7세손으로 여말·조선초 전서공을 지낸 류종혜 때
이다. 이후 대대로 하회에서 자손이 번창했고 지금도 하회마을 100여
가구중 70%를 풍산 류씨가 차지하고 있다. 전체로 보면 인구는 많지
않아 지난 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당시 국내에 2946가구에 1만1657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 대구 등지에 많이 살고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문경시 산양면 존도리 등에도 집성촌이 있다.
명재상의 가문이지만 정·관계에는 인물이 적고 경제계 등 다방면에
인재를 골고루 배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관계에는 13,14대
민정당 의원을 지낸 류돈우씨와 외무부장관을 지낸 류종하씨 등을 꼽
는다. 경제계에는 비교적 인물이 많아 류찬우 풍산금속 회장, 류시열
제일은행장, 류홍우 유성기업 회장, 류한섭 전 신세계 백화점 회장 고
문,류쾌하 전 서울시 버스사업조합 이사장 등이 있다. 전세계챔피언이
었던 류명우, 재일바둑기사 류시훈, 탤런트 류시원씨 등도 풍산 류씨
가 배출한 인물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