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루먼 쇼'의 에드 해리스
에드 해리스(49)의 얼굴은 격렬한 전투가 지나간 고원같다. 대중 시야
에 진입하기까지 그는 특별히 멀고 고된 길을 걸었다. '필사의 도전'(83
년)에서 영웅적 우주비행사 연기로 주목받고도 해리스의 30대는 적막하게
흘러갔다. 그가 우리에게 다가왔을 무렵엔 이미 애련에 동하지않는 바위
의 표정이 내려앉아 있었다.

'어비스'(89년)를 기점으로 해리스는 다른 스타들을 반석처럼 받치는
조연이 됐다. 탐 크루즈(야망의 함정)나 알 파치노(글렌게리 글렌로스)
뒤쪽에서 강철처럼 차갑게 빛나는 그의 시선에 붙들린 채 관객들은 짧게
전율했다.

'아폴로 13'(95년)의 휴스턴 관제센터에서처럼, 해리스는 늘 사람들을
엄한 절제로 다스렸다. 통제와 조작 욕구는 위태로운 야망과 통하는 법.

'닉슨'의 정치 모사, '더 록'의 반란 장군, 그리고 '트루먼 쇼'의 크리스
토프. 90년대 후반 들어 해리스의 경력은 '악의 꽃'을 활짝 피운다.

'트루먼 쇼'는 30여년 밤낮없이 한 남자 일상을 세계에 중계한 희대의
몰래카메라 쇼. 남자 트루먼의 인생을 요람부터 기획하고 조작한 제작자
크리스토프는 주제넘는 미디어 권력 횡포를 상징하는 악인이자 자기도취
예술가다. 트루먼이 세트를 탈출하자 그는 평생 걸작을 망칠 위기에 처한
다. 일순우리는 "너보다 내가 너를 잘 안다"고 트루먼을 차분히 회유하는
크리스토프를 믿고픈 유혹에 빠진다. 에드 해리스가 여유있는 독선을 연
기할 때면, 항상 악은 선에 위험스러우리만치 가까워진다.

트루먼과 크리스토프가 주고받는 마지막 대화는 에덴동산을 박차고 나
가려는 아담과 상심한 신의 토론처럼 들린다. 크리스토프는 평정을 잃고
소리친다. 바깥 세상은 병들었으니 내가 만든 세계에게 행복하게 살라고.

거대한 '트루먼 쇼' 세트는 결국 세상을 경멸한 한 인간이 은밀히 건설한
왕국이기도 했다. 현실에 절망이 깊을수록 팬터지는 집요하고 정교해진다.

그러나 그 팬터지는 때때로 사람을 다치기도 한다.

( 김혜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