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가 허구인가--. TV 사극 인기가 고개 숙일 줄 모른다.
'용의 눈물'에 이어 '왕과 비'도 시청자 눈길을 붙잡고 있다.
하지만 '왕과 비'는 수빈 한씨가 중심축으로 나서며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노는 궁중사극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오종록교수(왼쪽)와 정하연작가.
TV 역사극의 역사성에 대해 '왕과 비' 작가 정하연씨와
조선 초기 정치사를 전공한 오종록 고려대 교수가 얘기를 나눴다.
대화는 왕위를 찬탈한 군주 세조에 대한 평가로 시작됐다.(편집자주)
-정하연= 그동안 세조를 미화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
종래 사극과 시각을 달리했더니 집중포화가 쏟아지더군요. 인물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자기 합리화도 나오고, 고뇌하는 대목을 그린
것도 있습니다. 전 계유정난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어린 임금
단종을 놓고, 김종서나 황보인같은 권신이 정사를 좌지우지하니까,
세조가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거지요. 왕권정치 기틀을 마련하려고
애썼던 인물입니다.
-오종록= 세조는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보면,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탈취한 패덕한 군주입니다. 70년대 이후 세조에 대한 적극적
평가가 학계에서 나왔습니다만 박정희나 전두환 대통령 집권을
합리화하기위한 학문 외적인 이유가 많았어요. 세조를 재평가하려면
역사에서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느냐를 찾아야지 왕권정치
이념만으로 설명할 순 없습니다. 세조가 집권과정에서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업적을 남기는 데도 훨씬 순탄했을 겁니다.
-정하연= 세조가 살았던 시대는 절대 왕권이 요구되던 시기였다고
봅니다. 왕권이 약화되면 민중에 대한 지배층 수탈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전 연산군도 긍정적으로 그립니다. 역사학자들이
시대상을 제대로 그려주면 드라마 작가들이 훨씬 수월할 텐데, 저로선
벅찬 작업입니다. 재료가 빈약한 상태에서 요리를 하니 순탄할 리
있겠습니까.
-오정록= 세조 당시가 절대왕권이 필요했던 시대라는 설명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면 지배층 수탈을 막고
민중에게 이익이 구현될 수있지요. 하지만 국왕이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인물인지도 중요합니다. 사극은 인물을 그리더라도 시대를
반영할 수있는 시대상을 담아야합니다. 일본과 비교할 때 우리
작가들은 힘들게 돼 있어요. 대중이 공감할 만한 역사 서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연구자 책임이 큽니다.
-정하연= 세조의 비극은 정권 탄생에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명회같은 인물은 집권 이후에는 물러나고, 새로운
문신들이 충원돼야하는데 세조는 정권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어려웠어요.
-오종록= 전문가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들은 사극 내용을 바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사극에서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작가 해석이 역사 발전 방향이나
전체상을 제대로 그리는 데 얼마나 근접하느냐가 중요하지요.
('왕과비'가 요즘 다루는 인수대비에 대한 평가로 얘기가 이어졌다)
-정하연= 선배 작가들은 인수대비를 긍정적으로 그렸습니다만
전 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연산군 시대의 비극은 인수대비 때
잉태됩니다. 조선 왕조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지요. 궁중 '치마정치' 음모의 모태가
인수대비라고 봅니다.
-오종록= 불행한 인물인 연산군이 태어나는 과정을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설명할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드라마가 시청자 눈높이에 맞춰
전개돼야한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권력의 출발점은
왕실이니까 인수대비가 초점이 될 겁니다. 하지만 관료들은 이전
시대와 달리 왕으로부터 토지를 지급받지 않고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왕이 신하들을 통제할 수있는 수단이
약화되는 거지요. 이런 변화를 사극에 담아줬으면 합니다.
-정하연= 시대상을 세세히 전달해야 하지만 사극에선 대단히 힘든
작업입니다. 역사 지식이 사회에 풍부해야, 사극도 원만하게 흘러갈
수있는데…. 사극 하나로 역사 교육을 감당하는 것은 역시 무리예요.
-오종록= 역사 교육은 연대나 사건을 외우는 것만 해왔지 역사적
사고능력을 키운다거나 역사상을 재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90년대 이후 역사 교양서가 쏟아져 나왔지만 상업성에만 눈을 돌린 게
많았어요. 언론에서도 역사 소설이나 사극을 다루는 게 많이 줄었구요.
그러다보니 KBS에서 만드는 사극이 과거보다 비중이 더 커졌다는
사실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하연= '왕과비'가 인수대비로 넘어오면서 시청률이 더 오르고 있어요.
여성 시청자들이 보기 시작했어요. 방송사에선 도리어 걱정입니다.
여인들의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종래 사극으로 흐를까봐요. 하지만
그렇게 가지는 않을 겁니다. KBS가 사극을 잘 만드려면 작가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역사 전문가들도 참여할 수있도록 투자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