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영식 ##

장기영 경제기획원장 겸 부총리는 1964년 5월 취임하자마자 김정렴이
권고한 대로 시장자유화정책을 우직하게 밀고나갔다. 그는 긴축재정
정책을 견지할 것을 미국측에 대하여 보장하고 그 대가로 64회계년도중
5200만 달러 규모의 미국 국제개발처(AID) 차관을 얻었다. 1965년
3월22일부터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바꾸어
실시하면서 환율을 1달러 대 255원(종전은 1달러 대 130원)으로
평가절하하였다. 금리도 현실화하여 1965년 9월30일부터는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연 15%에서 30%로, 일반대출금리를 16%에서 26%로
대폭 인상하였다. 수입개방도 과감하게 실시했다. 1964년도에는 수입허용
품목이 400여 개였으나 다음해에는 1570개로 늘었다.


사진설명 :
장기영 부총리가 국회에서 답변하고 있다.

이런 시장자유화와 가격현실화 조치는 '가격의 매개변수적 기능을

구현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일련의 조치는 '정부의 대외지향적

개발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기반조성이란 점에서 60년대 초에 취한

정책중 획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경제기획원 펴냄. '개발연대의

경제정책').

시장자유화정책의 입안자인 김정렴(당시 상공부차관-재무부 장관)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이 정책의 성공으로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행정력에
대한 평가가 높아져 요사이 말로 하면 국가 신인도가 올라갔고 외자유치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때 IMF에서는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면 SDR(Special Drawing
Rights=특별인출권)을 쓸 수 있도록 허용하되 환율-금리-수입자유화를
조건으로 붙였습니다. 장기영 부총리가 이 일을 해내자 IMF에서는
개발도상국으로서는 희귀한 성공사례라면서 회원국가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외화유치에도 유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외환위기를
맞게 되면 IMF와 IMF를 사실상 조종하고 있는 미국이 뒤를 봐줄 것이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이때 IMF가 우리에게 요구한 개혁은 요사이 그들이
요구한 것과 거의 같았습니다. 시장자유화정책의 성공에는 장기영 부총리의
지도력과 그를 전폭적으로 밀어준 박정희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많은 장기영 부총리의 역금리 발상, 즉 예금금리를 대출금리보다
더 높게 매겨 예금을 많이 유치하는 한편 역금리로 인한 은행의 적자를
메우기 위하여 은행이 보유한 지불준비금에 한국은행이 이자를 붙여 준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금리-환율자유화 문제로
재무장관이 반발하면 장부총리는 설득을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안들으면
박대통령을 찾아가 해임을 요구, 경제각료들에 대한 자신의 인사권을
관철시켰습니다. 네 명의 재무장관이 그런 식으로 갈렸습니다."

김정렴은 장기영이 한국은행 조사부장으로 있을 때 그 밑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장기영씨는 추진력과 독서력, 문장력, 그리고 발상력이 엄청난
분이었습니다. 조사부장 때 여자 비서를 두 명 데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화를 받는 일을 맡았고 다른 비서는 장부장이 책을 읽다가
밑줄 친 부분을 정서하는 일을 했습니다. 정서한 문구를 담화 때 적절히
이용하였습니다."

김정렴은 "이분이야말로 가장 성공적인 은행원이었다"고 했다. 장기영은
부총리로 취임한 뒤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식의 관료적 은행업무는
전당포나 고리대금업과 같다면서 경멸했다. 그는 "유능한 은행원은 유능한
기업인을 발견하여 그를 키워주는 사람이다. 대출은 신용대출이 원칙이다"라고
생각했다. 장기영은 돈을 빌려줄 때 기업인의 인물됨을 가장 중점적으로
관찰, 평가했다고 한다. 기업인들과 술을 마실 때도 행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융자여부에 반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시장자유화 정책이 추진되고 있던 1964-65년엔 수출주도 전략의
뼈대도 마련되었다. 수출전략의 설계자로 알려진 당시 상공부 장관 박충훈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수출전선의 총사령관'으로 묘사했다.

'대통령이 무엇보다 수출을 중요시하고 강력하게 지원했기 때문에
상공부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다, 수출제일주의다 하는 것을 내세우고
수출하는 게 곧 애국하는 것이며 수출공장에서 바느질하는 여공까지 깡그리
애국자라는 것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가 연간 수출액을 1억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린 것은 1964년이
처음. 이해 총수출액은 1억1910만 달러. 1억 달러를 초과한 날인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혁명정부 시절인 1962년도부터 박대통령은
연간 수출목표 제도를 시행하면서 목표달성을 독려해갔다. 박충훈 장관은
1965-67년 사이의 3년간 총 7억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7년에는 3억달러의
수출고를 달성하겠다는 야심찬 수출3개년 계획을 세웠다. 1965년에 정부가
마련한 수출진흥종합시책은 수출업체에 대하여 조세, 금융상의 특혜 뿐
아니라 외교와 정보면에서의 지원도 포함시켰다(수출물품에 대한 철도요금의
할인제도도 있었다). 정부의 모든 조직이 수출업체에 대하여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지원을 맡고나선 것이다. 수출기업이 무역전선의 전투부대라면
정부는 정보-작전-군수지원을 담당한 셈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에 해외시장개척을 전담하는 대한무역진흥공사를
설립한 데 이어 65년부터는 대통령이 주재하는 청와대 수출진흥확대회의를
매달 한 번씩 열었다.

(*조갑제 출판국 부국장 *)
(*이동욱 월간조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