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들은 고려장 이야기 한토막. 할머니를 산에 버리고 온 아버지는
나도 나중에 아버지를 버리게 지게를 잘 놓아두세요 라는 아들 말에 놀라
할머니를 다시 모셔온다. 그러나 나라야마 부시코 (30일 개봉)에서 다츠헤이는
노모를 버리러 가는 길에 25년뒤 아들이 날 업고 여길 지날 거고, 또 25년이
지나면 아들도 업혀 여길 오겠지 라고 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나라야마 부시코는 고려장 비슷한 일본의 기로 풍습이 늙을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나 미개사회 악습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신 기속을 통해
삶의 본질을 혜안으로 꿰뚫어본다.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8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나라야마 부시코는
단연코 일본이 낳은 위대한 영화들에 꼽을 걸작이다. 얼마전 소개된 97년작
우나기는 이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다른 가치로 덧칠하지 않은
삶과 죽음을 인류학적 생생함과 엄격함으로 보아냈다. 그러면서도 인류학자가
갖지못한 시인의 절절한 통찰력까지 겸했다. 이마무라는 수백년전 일본 산촌에
흐르는 강렬한 원시적 생명력을 장면마다 담았다. 소변 보고 밥 먹고 섹스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게 실제 삶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미추 선악에 대한 가치판단 없이 수간에서 생매장까지, 갖가지 기담을
태연히 들려준다. 그에게 이 모든 기속은 부박한 산촌의 경제적 생산능력에
조응하는 도덕이며 적응과정일 따름이다.

어머니를 버리는 클라이맥스에서조차 통곡으로 과장하지 않았고, 초월하듯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어머니를 업고 가는 길을 길고 힘들게 그리면서
서설을 곁들임으로써 마지막 축복을 내릴 뿐이다. 죽음까지도 거대한 자연 속에
넉넉히 품어내는 관조의 깊이. 역설적으로 표현해 동물로서 인간 자존에 대한
영화랄까.

이마무라는 동물 연장선에서 인간을 자연 일부로 본다. 들판 섹스신 사이에
뱀 교미 장면이 끼여들고, 일가족 생매장 중간엔 죽은 쥐를 문 부엉이 모습을
담는다. 전투신에서 동물장면을 비슷하게 썼던 씬 레드라인의 화법이 한숨섞인
대조나 치환이라면, 이마무라 방식은 직유와 병렬이다.

놀라운 리얼리티는 감독이 배우와 스태프를 이끌고 산속 폐촌에서 2년동안
살며 찍은 덕분이다. 어머니 역 사카모토 스미코는 치아를 부러뜨려가며
열연했고, 아들 역 오가타 켄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