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열린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 첫날 회의에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던 강철환-안혁씨, 수용소 경비병 출신인
안명철씨,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해 귀순한 이민복-김은철씨 등
5명의 귀순자가 나와 북한의 참혹한 인권침해 실상과 탈북자들의
목숨을 건 유랑생활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을
요약했다. (편집자)


사진설명 :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북한 인권 실상을 증언하기 위해 참석한
탈북자들. 왼쪽부터 강철환, 안혁, 안명철, 이민복, 김경일씨. /김창종기자

◆북한 정치범 수용소

수용소 가기 전에 거치는 구류장(지하감방, 반지하감방)은 사방 2 크기로,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다.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부동자세로 있어야 하고, 움직이면 구타를 당한다. 말을 못하며 소변을 보려면 오른손
주먹을 들고, 대변을 보려면 오른손을 펴 들면 된다. 몸이 아프면 왼손 주먹을 드는 게 신호다.

체포장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밤에 납치당하듯 끌려온다. 구류장에서 정치범 수용소로 넘어갈 때도 재판 절차는
없다. 단지 김일성의 사진에 잉크 방울을 떨어뜨려 잡혀오거나, 외국유학 도중 그 나라에서 생산된 제품이 좋다고
말만 해도 잡혀오는 곳이 정치범 수용소다. 한 순간의 실수로 들어오는 당 간부도 있다.

수용소에서도 몇년, 몇십년을 살아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는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옥수수
19∼20알과 시래기 소금국 두 가지만 먹을 수 있다. 밤 9시까지 금광이나 벌목장에서 고역에 시달린다. 결혼이
금지돼 있어 애기를 가지면 강제로 낙태시킨다. 낙태가 불가능하면, 임산부와 태어난 아기를 함께 죽인다. 질병,
굶주림, 구타, 사고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다.

탈출자는 무조건 현장에서 사살하며, 사살한 경비병은 「포상」으로 대학에 보내준다. 붙잡힐 경우에는 모든
수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진다. 이같은 공개처형은 1년에 많을 때는 10여건, 적어도
5∼7건 있었다. 교수형이 끝난 뒤에도 이틀 정도 시체를 그냥 매달아 놓는다.

◆탈북자 실태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난민」 판정을 받는데 언론과 국제사회의 도움이 컸다. 한국 정부는 북한이나
중국 러시아 등과의 관계를 의식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나 인권 문제는 정치적 고려 대상이 아니다.
국제사회나 언론이 조용히 있으면 북한의 인권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도 외부 지원을 받고 있어 국제사회
요구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 90년 국제인권기구 관계자가 북한을 다녀간 뒤 김일성이 『감옥에 많은
사람을 가두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다』며 『범죄자들을 근로단체에 맡겨 교양사업으로 대체하라』고
지시해서 상당수가 감옥에서 풀려나기도 했다는 것이다.

중국 남부의 한 도시를 출발해, 걸어서 제3국 수도의 한국대사관에 안착하기까지 57일이 걸렸다. 그나마
북한과 외교관계가 없는 나라여서 운이 좋았다. 하루 평균 120리씩 걸었으며, 처음 10여일은 발에 물집이 생기고
다리가 아파서, 쉬지 않고서는 100 도 못갈 정도였다. 집안에서 잔 것은 불과 닷새. 제3국에선 군인들을 피해
산이나 정글로만 이동했다. 그러나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가 군인들에게 세번 붙잡혔다. 살기
위해 벙어리 흉내를 냈으나 흠씬 두들겨 맞았다. 군인들은 갑자기 라이터 불로 턱 밑을 지지기도 했다. 말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생살이 타는 데도 말을 하지 않았다.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오길 희망하지만 방법을 모르고 돈이 없어 시도하지 못한다. 처음 북경의 한국 대사관을
찾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더니 「한국으로 못가니 알아서 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