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가장 오랜 우리 신문―. 한국사와 함께 달려온 조선일보가 3월5일 창간된 지 80주년을 맞는다. 창간 특집으로 조선일보의 그 거대한 뿌리를 추적해보는 「조선일보 80」 시리즈를 오늘부터 연재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최대 신문을 자임하는 조선일보가 그동안 쌓아온 영광과 좌절, 눈물과 땀과 피의 기록들이다. 첫회는 한국의 신문 개척자로서 조선일보가 세운 언론 최초 기록들인 기자공채 컬러인쇄 신춘문예 전광판뉴스 등을 정리해 소개한다.
36년 8월 13일 백두산 정상에 오른 조선일보사 백두산 학술조사단. 이들은 비둘기로 기사를 송고하고, 천지를 카누로 탐험하기도
했다.(사진 위) 서울 광화문에서 행인들에게 동화상으로 뉴스와 정보를 전달하는 [조선일보 전광판]. 이미 38년 2월 조선일보는
종로 화신백화점 건물에서 전광뉴스판을 선보였다.
이상재 조만식 신석우 안재홍 신채호 문일평 염상섭 한기악 방응모 선생 등 오늘의 조선일보를 있게한 대표적 인물들을 조명한다.「옴부즈맨 전화」 「E메일 실명제」 등 90년대 이후 한국언론사에 새로운 지평을 연 새로운시도들과 조선일보 창간 즈음의 뒷얘기도 함께 싣는다. (편집자)
조선일보는 지난 80년간 숱한 `한국 언론 최초의 기록들'을 창조해왔다. 기자 공채, 컬러 인쇄, 전광뉴스, 연재만화, 조석간-지방판 발행, 국제 전화 취재, 취재전용기 도입… 80년의 시간 속에 조선일보맨들이 매일 매일 쏟아부은 땀과 눈물과 피의 산물인 이 기록들은 바로 한국 언론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24년 11월 23일에는 첫 조석간신문을 출현시켰고, 24년 7월 22일에는 최초의 지방판인 4면의 경북판을 발행했다. 본격적인 컬러 신문 시대도 조선일보가 열었다. 25년 2월 24일자. 지금과 같은 오프셋 인쇄(평판) 방식이 아닌 그라비어방식(오목판)이었다. 당시론 파격적 시도였다. 현재 사용중인 오프셋 컬러 고속 인쇄 윤전기 역시 70년 2월 10일 조선일보가 국내서 가장 앞서 사용했다.
24년 10월 13일자부터 조선일보 3면에 실리기 시작한 4컷 짜리 만화 `멍텅구리'는 한국 최초의 신문 연재 만화. 이상협 당시 편집고문과 안재홍 주필이 내용을, 동양화가 심산 노수현 화백이 그림을 맡았다. 우리나라 첫 신춘문예 당선작은 조선일보 28년 1월1일자에 실렸다.
그러나 일제 검열로 당선작 내용은 물론, 작가 이름도 삭제돼 버렸다. 형식은 지금과 달라 2개 소재를 주고, 소설체, 일기체, 시체로 써서 응모토록 했다. 공모국내 첫 100만부 발행기록도 갖고 있다. 33년 4월 26일자다.
30년대 들어 경영난에 봉착한 조선일보의 당시 사장 고당 조만식 선생의 권유로 계초 방응모 선생이 신문사를 인수해 부사장에 취임한지 1달여만의 일이다.
뉴스전광판도 조선일보사는 이미 60여년전에 처음 선보였다. 38년 2월5일 당시 서울의 명물이던 종로 네거리 화신백화점 6층 건물의 옥상에 가로 20m 세로 1.8m 크기의 뉴스판을 설치하고, `조선일보 뉴스'란 이름의 전광뉴스를 선보였다.
기자를 첫 공채한 민간 신문사도 조선일보다. 30년 4월3일자 7면에 `기자와 사원 채용시험'이란 2단 사고를 실었다. 논문시험제목은 `나는 왜 신문기자가 되려는가'였고, 기사작성, 시사용어 문제도 출제됐다. 120여명이 응시했고, 합격자는 개별통보됐는데, 그중에는 김기림도 있었다.
인터넷 동영상-위성방송 다매체 시대의 개막을 예감했는지, 조선일보는 일제하에서 활자가 아닌 영상문화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24년 12월17일에는 우미관에서 조선일보가 우리 손으로 첫 라디오방송실험을 했다. 26년 6월10일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장례식을 조선일보 활동사진반이 촬영, 이를 나흘 뒤 기록영화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하기도 했다.
34년 7월24일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의 대홍수 취재를 위해 경비행기인 살무손기를 임대, 생생한 현장 취재에 활용했다. 다음해에는 아예 이 비행기를 구입, 국내최초로 취재전용기를 보유하게 됐다. 당시 조종사는 한국민간항공 개척자인 신용욱씨.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던 36년 8월8일에는 베를린-동경-서울을 잇는 손 선수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국내 첫 국제전화취재를 하기도 했으며, 호외도 발행했다. 37년 1월10일자부터 본지에서 분리돼 별쇄 타블로이드판으로 발간된 `소년조선일보'는 첫 어린이 신문이었다.
국내 최초 영화제인 `조선영화전람회'(38년 11월26일), 첫 음악콩쿠르인 `전조선음악콩쿠르'(35년 9월19일)도 주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