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 해암 안병무(1912~1986) 선생이
30년대 후반부터 해방될 때까지 중국 등지에서 활약하며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중국인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중국언론에 쓴 기사 기고문 번역문 등이 3·1운동
81주년을 맞아 28일 공개됐다.

전체분량은 중국어로 30만자 가량이며 대부분 일본정세, 항일, 망명한인들의
독립운동 등에 관한 보도기사들이다. 여기에는 한국광복군 근황, 일본 통치하의
조선 근황, 윤봉길의거 10주년 회고기사 등이 포함돼 있고 중국인들에게 조선의
독립운동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촉구하는 기사들도 많다.


사진설명 :
해암 안병무선생의 중국군 유격간부 시절.오른쪽은 선생이 쓴 일제의 잔학상 폭로 기사들을 설명하고 있는 3남 안재정씨와 부인 장순옥여사. (*조인원기자
iwcho@chosun.com*)

특히 선생의 3남 안재정(46ㆍ서울 송파구 잠실동)씨는 중국어로 된 당시의

기사들을 번역하기 위해 91년부터 중국어 공부를 시작, 80% 가량의 번역을 끝내

이 날 번역문을 함께 공개했다. “생전에는 아버님의 독립운동 내용을 소상히

알지 못하다가 이번에 번역작업을 하면서 아버님의 애국심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암은 18세 때인 32년 도산 안창호선생에게 전할 백부 안이식씨의 밀서를
휴대하고 상해로 망명, 복단대학과 중산대학에서 대학교육을 마치고 1938년
1월부터 40년 8월까지 중국 장사시의 중국어 일간지 '역보' '항전일보',
반월간지 '건군' 등에 일제비판과 식민 한국의 실정을 폭로하는 글을
기고했다. 중국어 영어 일본어에 능했던 그는 이후 중국 중앙군관학교
일본어교관을 거쳐 41년부터 43년까지 전선일보사 편집조사부장으로 활약하며
다시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 44년부터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선생은 귀국 후 국립체신학교 부교장을 시작으로 5개 학교의 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자로 생을 마쳤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들은 주로 '역보' '항전일보' '전선일보' 등에
실린 기사들이다. 43년 3월2일자 '역보'에 기고한 '3.1대혁명운동의 회고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전망'에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3.1운동에 대한 평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3.1대혁명운동은 두가지 우수한 면이 있다.
광대한 민중동원과 행동의 기밀성. 동시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자체 역량 미숙, 국제적 원조 부재, 일본에게 적대적인
나라가 없는 시점이어서 조선민중에만 전념해서 억압." 그러면서 43년
당시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중국의 동북 3성에 4-5만명의
조선독립군이 활약하고 있는 등 양과 질에서 조선 민족 자체의 혁명역량 증강,
둘째 중국과 소련이 일본의 침략주의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조선민족 해방운동에 유리, 세째 일본의 국제적 고립 가속화 등이었다.

중국내 무장독립투쟁과 관련된 문헌자료들이 아직도 부족한 학계 현실에서
다양한 독립활동을 취재해 보도한 선생의 자료들은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안재정씨는 "나머지 부분에 대한 번역이 끝나는 대로 원자료는
공적인 기관에 제공해 학문적 연구자료로 활용토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