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이미 ‘오랑캐 ’에다,‘개 돼지만도 못한 인간 ’으로 낙인찍힌 강홍립이었던 만큼 그에 관한 그림 자료가 거의 없다.그림은 사르후 전투에서 패한 강홍립이 투항하는 장면.무릎을 꿇은 이가 도원수강홍립이다.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 12-국가재건과 청의 침입 ’(한길사)중에서.

강오랑캐라고 불린 사내가 있다.

겁 많고 어리석고 개나 돼지만도 못한 인간.

금의환향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10년만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출정
인사를 아뢰었던 군왕도, 모화관까지 환송을 나왔던 비변사의 당상들도,
하다 못해 대전내관까지 바뀌었다. 달라진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선 후금의 장수들, 그가 껴입은 후금의 관복, 시중을 드는
후금의 여인들. 그는 너무 멀리까지 갔고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1618년 봄, 전쟁의 불바람이 요동을 휘감았다.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해군은 원군을 보내라는 명나라의 요구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당대의 실력자 이이첨과 비변사의 당상들이
존명배청의 명분을 틀어쥐고 파병을 거듭 청하자, 하는 수
없이 원군을 이끌 도원수로 강홍립을 지목했다. 강홍립은 6월에 두 번,
8월에 한 번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미 그는 일만 대병을 이끌고 북풍한설
몰아치는 요동으로 가기에는 몸도 마음도 쇠약한 쉰아홉 살의
노장이었다.

광해군은 그의 바램을 들어주지 않았다. 선조 32년(1599년) 함경도사
강홍립이 올린, 한양의 포수들을 충원하여 여진의 노토부락과
명가노부락을 역습하자는 북벌계획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무를 겸하면서 북삼도와 여진의 사정에 그만큼 밝은 장수는
없었다. 물불 가리지 않는 맹장보다는 경험 많고 유연한
지장이 필요했던 것이다.

느림보 행군이었다. 뙤약볕이 따가운 7월에 한양을 떠난 원군은
동지섣달에도 압록강을 건너지 않았다. 최대한 시일을 끌며 요동의
전황을 살피라는 밀명 때문이었다. 명군이 승리하면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릴 작정이었다. 그런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르하치의 군대는
명군을 몰아붙였고 강홍립과 일만 원군은 압록강을 건넜다. 격변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선 것이다.

사르후(살이호)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대패했다. 동로군
사령관 유정이 죽고 원군의 좌영장 김응하도 장렬하게 전사했다.
강홍립은 정세를 잘 살피고 행동을 결정하라(관형향배)는 광해군의
밀명을 떠올리며 장졸을 이끌고 후금에게 투항했다. 여진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한 최초의 조선 장수라는 오명이 씌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강홍립은 누르하치와 함께 요동의 격전지를 구석구석 누볐고,
천자의 나라가 오랑캐의 나라에게 밀리는 전황을 비밀장계에 적어
조선으로 보냈다. 강홍립은 세계로 통하는 광해군의 눈이었다. 오직
강홍립만이 세계의 변화를 직접 목도하였던 것이다. 육십 노구가 낯설고
물선 황야에서의 행군을 감당하기란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작은 긍지가 있었다. 나를 통해 조선은 세계의 변화를 읽고 생존의 길을
모색하리라.

그러나 운명은 투항한 장수에게 그런 작은 위안도 허락하지 않았다.

1623년 3월, 광해군이 용상에서 쫓겨난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오랑캐와의 야합으로 몰아붙였고, 그
야합의 중심에 강홍립을 놓았다. 강홍립을 통하여 세계를 보던 창을
스스로 닫아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윤이 후금으로 도망쳐와서 강홍립의 폐부를 찔러댔다. 가족들은 이미
하옥되었고 귀국하면 대역죄로 참형을 면치 못하리라.

4년 동안 강홍립의 요동 생활은 부귀와 영화 그 자체였다.
「연려실기술」을 살피면, 강홍립이 누르하치의 둘째 아들
다이샨(대선)의 양녀와 결혼을 했고 또 명나라 포로 5백 명을 하인으로
받았다는 언급까지 나온다. 누르하치의 배려로 행복한 말년을 보장받은
것이다. 맛난 술과 아리따운 이국의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세상 시름 모두 잊고 이대로 살다가 가자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까. 버린 자식 취급을 당한 조선에게 앙갚음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1626년 보위에 오른 홍타이지(황태극)는 이듬해 1월 조선정벌을 명한다.
누르하치의 조카 아민의 3만 대병에는 강홍립도 끼여 있었다. 10년
전 조선의 도원수로 일만 원군을 이끌고 도성을 떠났던 그가 후금의
장수가 되어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북삼도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명나라와의 전쟁으로 단련된 후금의 군대를 막을 수 없었다.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강화도로 몽진을 떠났다.

강화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강홍립은 양측의 입장을 조율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한윤 같은 이는 팔도를 불바다로 만들자고 했으나
강홍립은 조선을 위해 노력했다. 인조와 대신들에게 후금군의 장단점을
자세히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후금이 형제의 맹약을 다짐하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도록 이끌었다. 만약 그가 지난 세월의 복수를
원했다면 경기와 강원은 물론 하삼도까지 후금의 군대를 데리고 내려갈
수도 있었으리라.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강화를 맺은 후금군은 승전고를 울리며 귀국길에
올랐지만 강홍립은 남았다. 그는 왜 요동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향수
때문이었을까. 우물 안 개구리처럼 명나라의 승리만을 낙관하는 조선의
왕실과 조정을 향해 무엇인가 아직도 덧붙일 충고가 남았던 것일까.
후금의 보복이 두려워 면전에서 욕하지는 못했으나 아무도 그를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 요동에서 거느렸던 하인과 첩과 금은보화가 속속
도착하자 비난의 목소리는 도성의 하늘을 뒤덮었다. 회한의 눈물만이
그를 위로했다.

7월에 그는 병으로 죽었다. 1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을 누빈 경험을
고국을 위해 쓸 기회는 끝내 주어지지 않았다. 3년 후 석주 권필의
서질인 권칙이 강홍립을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 「강로전」을
지었다. 죽어서도 그는 영원히 강오랑캐였다.

(김탁환 / 소설가, 건양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