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카르트의 과학철학에 회의, 정신-인문과학 기초한 방법론 마련 ##
독일이 낳은 현대 철학의 거장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가 11일 101세
생일을 맞는다. 하이데커 야스퍼스 하버마스 등 20세기 철학의 정수들과
교유하며 '해석학'이란 득의의 영역을 개척한 그는 지금도 자신이
몸담았던 독일의 대학 고도 하이델베르크에 살며 철학사상 최고령
'현역'의 활기를 구가하고 있다. 1960년 그의 강의를 들은 바 있는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가 최근 가다머를 만나 그의 학문과
사상을 육성으로 들었다. ( 편집자주 )
40년 전의 하이델베르크….
당시(1960~61년 겨울학기) 철학과엔 20세기 독일철학의 거봉 하이데거
문하에서 함께 나온 칼 뢰비트 교수와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교수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유태인인 뢰비트가 히틀러의 집권 후 이태리,
일본 둥지를 전전하다 끝내 미국으로 망명한 데 비해 부친이 마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가다머는 순탄하게 독일의 '아카데미 만다리'라는
교수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패전 후 그는 소련군 점령 치하에서
라이프치히 대학의 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과거 제3제국 시대의
행적이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1933년 나치스 치하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임명된 하이데거가
취임연설에서 '근로봉사·국방봉사·학문봉사'를 대학의 이념으로
제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45년 하이데거와 비슷한 40대의 나이에
대학총장에 취임한 가다머는 '사물에 대한 객관성', '자기자신에 대한
정직성', '타자에 대한 관용성'의 덕을 대학 이념의 트리아스(삼화음)로
내세웠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다머의 시대는 1949년 스위스로 떠난 칼 야스퍼스의
후임으로 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옛 동창 뢰비트를 불러들인 데 이어 점차 그 주변에
환 데어 모일렌, 하버마스, 헨리히, 슈패만, 토이니센, 투겐트하트 등
전후독일 학계를 주름잡은 쟁쟁한 석학들을 부르고 또 모이게 했다.
그래서 가다머의 제자이자 논쟁의 적수이기도 한 하버마스는
하이델베르크가 가다머 덕택에 이삼십 년 동안 '공화국의 철학적
중심지'가 되었다고 일컫기도 했다.
내가 하이델베르크에 유학갔던 1960년은 그러한 가다머의 학문적 생애의
정점을 이룬 해이기도 했다. 그의 필생의 업적이라 할 대표작 '진리와
방법'이 마침내 그의 회갑에 맞춰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대의
테오도르 아도르노나 칼 포퍼 등이 이미 40세 전후에 대표작들을 내놓은
것에 비하면 가다머 철학의 '대기만성'은 하나의 예외이기도 했다.
근대 서양의 철학적 기초를 확립한 데카르트가 죽은 날이 1650년
2월11일. 그로부터 정확하게 250년이 되는 1900년 2월11일에 가다머가
태어났다는 것은 물론 우연이다. 그러나 이 우연은 데카르트와 가다머가
인간적 사고의 '방법론'에 관한 성찰에서 다같이 세계철학사에
획기적인 업적을 세운 두 거인이란 점에서는 '매우 행복한 우연'이라고
캐나다의 철학자 쟝 그롱당은 말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과거의 모든 지식체계를 '방법론적인 회의'를 통해 백지로
돌려버리고 그 바탕 위에 기하학과 같은 확실성과 명중성에 근거한
근대학문의 합리주의적 토대를 닦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다머의 사색은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통로라 일컫는 바로
데카르트적 방법이념의 보편적 적용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론'의 독점은 진리의 다른 체험을 은폐하거나 불가능하게
만들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데카르트가 전통과 선입관, 무릇 '인간적인' 모든것을 추상하고
기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근대 자연과학의 인식에 방법론적 기초를
확립해 주었다고 한다면 가다머는 데카르트가 무시한 다른 진리체험의
영역, 곧 인간적 삶이나 역사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정신과학
내지 인문과학의 인식에 방법론적 기초를 닦아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그의 '철학적 해석학'이다.
데카르트가 철학과 과학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면 가다머는 철학과
문학 예술 사이를 가교하는 데 기여한 셈이다.
지난 해 2000년 2월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의 학계와
언론계는 두 가지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가다머의 1백세 생신 잔치와
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 출간 40주년 잔치….
스스로 '최고령의 20세기인'이라 평소 농칭하던 대로 가다머는 비단
독일 철학계의 드와양(최고참)일 뿐만 아니라 고대 아테네의 소피스트
이소크라테스(BC 436~BC 338)도,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드
러셀(1872~1970)도 끝내 문전에서 넘지 못한 1백세의 고비를 넘긴,
아마도 아직까지는 세계 철학사의 유일한 최고령 현역이 아닌가
생각된다.
올해 2월11일은 19세기 마지막 해에 태어나서 20세기의 전기간을 살고
다시 21세기에 진입한 가다머가 만 101세가 되어 세번째 세기에 맞는 첫
생일이다.
그를 두달 앞두고 나는 지난 해 연말 알트(alt·옛) 하이델베르크의 노
스승을 네카강 좌안의 치겔하우젠 사저로 40년만에 찾아 뵙고 두시간
동안 철학적·예술적 담론과 함께 백세옹의 여러 가지 회고담을 들었다.
80년 전후엔 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 초빙되어 강단에 서고 90년
전후에는 이태리의 RAI공영방송과 더불어 '서양사상의
뿌리'(국내에서도 EBS서 이미 방영) 또는 '세계의 문화유산'등 주로
젊은이·일반인을 위한 철학적 교양 프로그램 제작을 인도하기도 한
가다머 교수는 아직도 정신적 활력이 백세옹 같지가 않았다.
다만 40년 전에는 소아마비로 발을 절기는 했으나 단장을 짚지는
않았었는데 이번에 뵐 때엔 양쪽에 지팡이를 짚고 나온 것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이를 먹으니 다시 네발로 걷는다"고 그는 웃고
있었지만.
두시간이 지나 일어서려고 할 무렵 현관에서 벨이 울렸다. "그냥 앉아
있어요, 나하고 매일 체스(서양 장기) 두러 오는, 음악하는 친구야"하고
말리기에 그냥 눌러 앉아 마지막 질문을 던져봤다. "장수의 비결은?"
"일찍 병치레를 한 덕분"이라는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똑같은 대답을
1966년 스위스의 바젤에서 당시 83세의 야스퍼스에게도 들은 일이 있다.
그러자 장기판을 기다리던 방문객이 곁에서 말을 거들어 주었다.
"아니, 마당에 저 자전거를 보세요. 선생은 저 앉은뱅이 자전거를 매일
40분씩 타세요. 그리고 선생의 치아를 보세요. 사람이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입니다.(독일 말로 "만 이스트 바스 만 이스트(Man ist was man
isst)."
그로고 보니 잇몸이 튼튼해서, 짧기는 한 이가 가지런한 모습은
젊은이들의 건치만 같았다. 의치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책에 서명을
부탁드렸더니 돋보기도 없이 글을 써주셨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외국인의 서툰 독일어를 두시간 동안 보청기도 없이
잘도 들어주었다. 백세옹 가다머는 역시 '인류학적인 페노메나(현상)가
아닌가 싶어졌다.
(최정호·울산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