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피버디박물관에 '유길준室' ##
이국 땅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100년 넘게 잠들어 있던 한국 '개화의
꿈'자취들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됐다.
1884년. 외교 사절단으로 미국에 왔다가 조선인 최초의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주 바이필드(Byfield)에 체류하며 하버드대 진학을
꿈꾸던 조선 청년이 있었다. 훗날 '서유견문' 저자로 기록되는 개화
선각자 유길준. 청년은 당시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장이며, 동아시아
문화에 깊은 관심이 가진 모스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며 하버드대 진학
준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언어의 장벽을 딛고 1등을 하기도 한
수재였다.
그해 11월. 청년은 아예 머리도 짧게 깎고 한복도 벗어 던졌다. 청년은
자신의 옷과 모자, 부채, 명함 등을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기증했다.
순탄하던 청년의 운명은 단 한 달이 지나 급변했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민영익이 개화파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갑신정변)을 듣고,
청년은 하버드대 입학의 꿈을 접고 귀국하고 만다.
이제 근 120여년이 지나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은 조선인 청년을 기려
그의 이름을 딴 전시실을 만들고, 2500여점의 한국 유물을 전시하려고
한다.
피바디 에섹스박물관은 모스관장과 유길준의 친교 관계 등을 바탕으로
19세기말~20세기 초 한국 관련 유물을 지속적으로 수집했다. 그러나
100여년 가까이 이들 유물들은 수장고 신세를 져야 했다. 독립된 한국
전시실이 없어서였다. 유길준의 유품은 물론, 개화파의 핵심 인물이던
김옥균이나 서광범 윤웅렬의 명함하며,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
표암 강세황의 그림, 한말 한국인 외교 고문으로 활동했던 독일인
뮐렌도르프의 수집품인 토기와 냄비, 바구니, 빗자루, 칼, 가위, 담뱃대
등 당대의 사회 풍속을 바투 살피게 하는 각종 민속품 등이 모두 그런
운명이었다. 심지어 잘 생긴 우리 장승 한 쌍이 일본 전시실에 우두커니
서 있기도 했다.
피바디 에섹스박물관 소장 한국 유물들은 지난 94년 조선일보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공동 기획한 '유길준과 개화의 꿈' 전시회를 통해
우리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면서 탄성과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를
계기로, 피바디 에섹스 박물관에 독립된 한국실을 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일었다. 조선일보가 전시회 수익금과 기타 모금액 30만
달러를 이 박물관에 기부한 것도, 국제교류재단이 2000년 지원협약을
체결해 총 90만달러를 지원키로 한 것도 독립된 한국실 개관을 위한
것이었다.
수잔 빈 피바디 에섹스박물관 한국담당 큐레이터는 "개관을 위해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많은 한국인 학자들의 도움을 받았다"며
"스미소니안박물관과 더불어 미국내 최고 수준의 한국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피바디 에섹스박물관은 19세기 말 격동했던 조선의 역사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유물을 선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길준은…1883년 외교사절로 도미
개화사상가이자 정치가. 1870년, 중인 출신의 개화파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등과 수학했다. 박규수의 권유로
신사유람단(1881년)에 참가했으며, 1883년 최초의 대미 외교사절로
미국에 건너갔다. 갑신정변(1884년 12월) 실패 뒤 귀국했지만,
감옥균과의 친분관계로 체포, 1892년까지 연금당했다. 그 때 집필한 것이
서유견문(1895년 출간)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뒤 내부대신이 돼
단발령 등을 시행한 을미개혁의 주역 중 한사람으로 활약하다가,
친러내각 수립(1896년) 뒤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고종 폐위 뒤
귀국했지만,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에 반대해 일제가 수여한 남작 작위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