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모두 주술(magic)에 걸려있는 듯하다. 우리 모두를
매료시키는 이 주술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는 대표팀의 눈부신
활약이다. 다음으로는 붉은악마의 열렬한 응원이다. 전세계를 경악케
하고 우리 스스로를 놀라게 한 붉은악마 열풍은 29일 터키와의
3·4위전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울 전망이다.
사람마다 붉은 악마를 보는 느낌과 주목하는 측면이 다르겠지만, 필자는
'붉은'이 주는 색감과 '악마'가 주는 어감에 우선 흥미를 느낀다.
'붉은' 색감은 우리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동양에서는
원래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데에 활용된다. 부적을 붉은 주사(朱砂)로
그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악마'의 어감은 우리 스스로 악마가
됨으로써 더 이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그러나
붉은악마에는 이러한 풀이 말고도 그 이면에 진짜 주목해야 할 내용이
있다.
모두가 보면 알겠지만 붉은악마 응원단이 들고 있는 깃발이 태극기만은
아니다. 응원석 앞에 걸려 있거나 휘두르기도 하는 대형의 도깨비 얼굴을
그린 깃발이 있다. 이 도깨비 얼굴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동양의
아득한 신화시대의 영웅 치우(蚩尤)이다. 붉은악마 응원단은
홈페이지에서 그들의 상징으로 치우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홈페이지에는 '한단고기'라고 적고
있다)와 같은 재야 사서를 인용하여, 치우가 고대 한민족의 강력한
임금이었고 그 투혼의 이미지를 취하였노라고. 여기서 '환단고기'라는
책이 신빙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붉은악마 응원단을 상징하는 치우의 이미지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치우는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치우는 중국의 동방에
거주하던 구려(九黎)라는 종족의 군장이었다. 그의 형제는 72명이나
되었는데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머리를 하고 모래와 돌을
밥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들의 용감하고 강인한 성품을 표현한 것이다.
치우의 생김새는 여덟 개의 팔 다리에 둘 이상의 머리를 지녔다는 설도
있고, 사람의 몸, 소의 발굽에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지녔다는
설도 있다. 치우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결국 당시
서방에서 세력을 키웠던 황제(黃帝) 집단과 중원의 패권을 두고 충돌하게
된다. 이 황제는 후일 중국인의 조상이 된다. 탁록( 鹿)이라는 땅에서
벌어진 동·서방 양 진영의 큰 전쟁에 모든 신들이 참여하는데 치우
편에는 풍백(風伯)·우사(雨師) 등이 가세한다. 이들은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다.
치우는 처음에는 아홉 차례나 승리하였으나 막판에 패배하여 황제에게
사로잡혀 죽는다.(이것은 중국측의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치우는 이후 전쟁의 신으로 부활하였다. 후세에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은 그의 강렬한 투쟁 정신을 숭배하여 그에게 제사를 드려 승리를
기원하였던 것이다. 치우는 또한 은(殷)나라 때에 도철( )이라는 무서운
괴물의 모습으로 청동기에 새겨져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신라 시대의 도깨비 얼굴을 새긴
귀면와(鬼面瓦)는 이러한 전통을 이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거 동방의 영웅이었던 치우의 투혼과 사악한 기운을 쫓는
이미지가 오늘의 붉은악마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응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신들리게 했던 형언할 수 없는 기운,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고대 영웅의 넋이 아니었을까?
신화가 사라진 시대에도 우리는 마음만 모으면 언제든지 영웅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깨달았다. 우리 모두 주술을 걸자!
(鄭在書·이화여대 중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