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별세한 임원식(林元植·83)씨는 지휘자, 음악교육자로서 한국
음악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많은 음악인들은 임 선생의 업적으로
서울예술고등학교의 창설을 통한 영재교육 헌신, 한국 교향악계 여명기를
개척한 지휘활동을 가장 먼저 꼽는다. 임씨는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과 함께 이화예술고등학교를 창설했다. 이 학교는
이후 서울예술고등학교로 개명, 임씨가 교장을 지냈다.
임원식씨는 우리나라 교향악계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1956년
KBS교향악단 창설 때부터 1970년까지 이 오케스트라를 '상임'으로
지휘했다. KBS교향악단이 1969년 국립교향악단으로 재편됐을 때도 그가
초대 상임 지휘자를 맡았다. 1948년 '국제 오페라사'가 한국 최초의
오페라로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를 무대에 올렸을 때도 지휘는 임씨
몫이었다. 2000년 박은성씨가 회장을 맡아 발족한 한국지휘자협회도
임씨가 산파역을 맡았다. 지난 6월 1일 도쿄에서 정명훈씨가 고문으로
있는 도쿄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것이 임씨의 마지막 지휘 무대가
됐다.
임원식씨는 191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하얼빈 제일음악학원과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이화여고에서 가르치며
고려교향악단(서울시향 전신)을 지휘하다 도미(渡美), 줄리아드음대서
수학했다. 귀국 후 이화여대·서울대음대·추계예대 교수와 한국음악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동베를린사건으로 윤이상이 구속돼 재판을 받을 때
임씨가 재판정에서 윤이상을 변호한 일화는 유명하다. 임씨는 윤이상의
'교향곡 3번' '바이올린협주곡' 등을 국내 초연(初演)했고, 결국
불발에 그친 윤이상의 귀국 추진에도 앞장섰다.
음악평론가 한상우씨는 "신념 앞에 타협하지 않는 직선적 성격으로,
평생을 한국 음악발전에 헌신한 풍운아였다"고 임씨를 추모했다.
플루티스트 고순자(高順子)씨와의 사이에 1남2녀.